## 전성기 100만거주 `불국 신라' 수도...이질문화 흡수-소화 ##.

힘찬 것, 생명력이 넘치는 것, 살아 있는 것이 한국문화의 독창성,
특이성이라 했다.

그러나 「힘이 넘치는 생명력」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살아있는 목숨
이란 무엇인가. 입을 통해서, 코를 통해서,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아니 숨구멍, 땀구멍, 온몸을 통해서 「밖」의 것을 내 「안」으로 끌어들
이는 힘, 바로 나와 다른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힘이다. 「엘랑 비탈」
(삶의 약동)을 철학자 베르그송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생명이란
「필연」 속에 파고 들어가서 그것을 자기 이익이 될수 있도록 바꿔놓는
「자유」다』라고.

민족의 문화적 생명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우리들의 삶에 이익이 되도록 동화하고 소화하
는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의 독창성이란 「위장의 문제」. 먹은 것을 소화
하는 위장의 문제란 말은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독창성의 온상은 자기내부에 침잠하는 폐쇄성이 아니라, 외부의 이
질적인 것을 동화 섭취하는 마당발의 개방성이다.

우리 문화유산기행의 출발점으론 다른 대안이 없다. 경주.

식성좋은 마당발의, 신라인의 경주. 불국사가 있는 불국토의
수도 경주. 국보가 23점, 보물이 45점, 사적이 52개소나 몰려있는 영
원한 고도 경주.

일본의 불교학자(겸전무웅)는 경주를 보면 자기네의 옛 나라
를 생각한다고 하지만, 나는 경주를 보면 로마를 생각하게 된다.

신라 1천년의 수도 경주는 그의 전성기에 17만8천936호를 기록하고
있었다던가. 호구당 가족수를 5∼6명 잡아도 경주는 이미 백만명을 헤
아리는 고대 세계의 메트로폴리스. 2천년 역사의 시간만이 아니라 도
시공간의 규모에 있어서도 경주는 로마에 버금가는 동아시아의 메트로
폴리스, 「세계도시」였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 공인(313년)
되고 테오도시우스대제에 의해서 국교로 선포(391년)됨으로 해서 유럽
의 「세계종교」가 되었다고 한다면, 불교는 국경을 초월하여 비슷한 무
렵에 동아시아의 「세계종교」가 된다. 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이고(372
년)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것(384년)도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때
와 비슷한 4세기말이다.

다만 당시 3국 가운데서 동아시아의 「세계문화」의 중심지였던 중
국으로부터 가장 멀리 격절해 있던 신라만은 6세기에 접어들어 이차돈
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 시대에 비로소 불교 공인을 선포하게 되었다
(527년).

그러나 결승지점이 없는 역사의 마라톤에는 영원한 선두주자도 영
원한 후위주자도 없다.

일단 후진국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자 씨족중심의 귀족세
력에 발목이 잡혀있던 신라왕실은 「불법」과 「왕법」을 동일시하고 부처
님의 위력을 임금님의 위력으로 대치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왕권의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동아시아의 세계종교였던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신라는 또다른 세
계의 중심문화와 연결을 갖게 되었다. 이미 한자를 수용하고 유교문화
를 받아들임으로써 중국의 문화에 연결되었던 것처럼.

무릇 한민족은 이질적인 문화를 흡수-소화하는 참으로 위장이 튼튼
한 민족이라 하겠으나 신라인은 특히 식성이 좋았었던 모양이다. 통일
이후에나 통일 이전에나 그들은 멀리 중국에서만이 아니라 가까이 이
웃 백제로부터도 좋은 것이면 뭐든지 받아들이는 배포가 있었던 듯 싶
다.

신라 최초의 절이라는 흥륜사지에서 나온 인면 무늬 와당. 일본인
의 손으로 건너갔다가 지난 1972년, 32년만에 「환국」한 신비스런 미소
가 감도는 사람 얼굴을 새긴 와당. 시인이 『…이런 모습이 있
어 우리는 고향을 못잊고, 조국을 못잊고, 겨레를 못잊고, 끈질기게견
디며 여러 천년의 역경을 안 죽는 마음으로 살아서 왔다』는 「우리들의
어머니의 미소」를 새긴 와당. 그 와당도 흥륜사를 짓기위해 신라로 건
너온 백제 와공이 고향에 두고온 애인을 그리며 빚은 것 같다고 전해
진다.

몽고의 침입으로 완전소실되어 사라져 버렸지만 높이 80미터(!)에
이르는 황룡사 9층탑은 신라조정의 초청으로 백제에서 건너온 장인 아
비지의 작품이다. 일명 무영탑이라 일컬어져 애틋한 전설을 남기고 있
는 불국사의 석가탑도 백제의 석공 아사달이 불사를 위해 그리운 아내
를 저버리며 공력을 들여 세운 탑이라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베스트 셀러를 쓴 유홍준 교수는 심지
어 경주의 첨성대에서 보는 「우아하면서 온순한 느낌의 형태미」 조차
「신라적이라기보다 백제풍」이라고 적고 있다.

좋은 것이면 내것 네것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저와 같은 포용력,
동화력이 어떤 면에서는 통일신라의 문화적 바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점에서도 신라는 다시 로마를 연상케 해준다. 폴리스(도시국가)
의 발전을 위해 아무리 큰 기여를 해도 아테네 시민의 양친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끝내 시민권을 주지 않았던 아테네와는 달리, 로마의
법을지키면 누구나 시민이 될 수 있었던 로마. 그래서 멀지 않아 지중
해에서 라인강의 동쪽까지를 아우른 대제국을 건설하여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를 구축했던 로마.

신라는 그처럼 불사를 위해서는 누구나 어디에서나 사람을 끌어 들
여 모으고 일을 맡기고 하는 포용력을 보임으로써, 끝내는 3국이 갈라
져 다투던 한민족에게 어떻든 「신라의 평화」를 구축하고 말았다.

그 신라의 이 경주다. 한반도의 로마. 아니 오늘의 황량하고
적료한 경주를 로마라고?.

나는 지난 연말 우연히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19세기 풍
경화의 거장 코로(Camille Corot) 회고대전을 구경했다. 그의 이탈리
아 시절 작품에는 「토스카」의 배경이 된 테베르 강변의 산탄젤
로성을 스케치한 그림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로마관광의 어엿한 한 명
소가 되어 있는 이 자리가 코로가 그린 19세기의 모습에서는 마치 복
개하기이전의 의 청계천변처럼 지저분한 걸 보고 나는 놀랐다. 그
러고 보면 우리들의 문화유산인 과거의 도시 경주도 1백년후에는 오늘
의 로마처럼 가꿔질 수도 있는 미래의 도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
기 위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