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운 교수(한국사)가 최근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관한
본격연구서인 「고려시대 개경연구」(일지사간)를 펴냈다. 박교수는 이
책에서 개경의 성립과 행정체계 등을 상세하게 밝히고 인구수는 50만
명 가량 됐을 것으로 추산했다.

한국에서 개경만을 연구한 책이 나온 것은 매우 드문 일. 일제 때
개성박물관장을 지냈던 고유섭이 1945년 「송도고적」을 펴낸 뒤로 개
경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적으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처럼 개경연
구가 한국에서 적은것은 현재의 개경이 북한에 있어서 연구에 필수적
인 답사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관련 사료들도 매우 희소하기 때문. 박
교수는 그러나 『고려 5백년 역사는 개경에서 이루어졌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고려사에서 개경이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고 말
했다.

개경의 구역은 현종 20년(1029년), 외성인 나성이 21년만에 축조
완료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송악군과 개성군 지역을 성으로 두른것인
데 이는 강감찬 장군의 건의에 따른것.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
성을 축조하는데 연인원 30만4천4백명이 동원됐다. 박교수는 북한 학
자 전룡철이 80년에 발표한 실측 결과를 인용, 성의 길이는 23㎞, 동
서 길이 5.2㎞, 남북 길이 6㎞, 넓이는 2천470만㎡라고 소개했다. 이
나성에는 대문이 4곳, 중문 8곳, 소문 13곳등 모두 25개의 문이 설치
됐다.

나성안에는 황성과 궁성 등이 지어져 있어 개경은 3중성인 셈이라
고 박교수는 설명했다.

고려는 성종 14년(995년) 당나라의 제도를 본떠 개성부를 설치하
고 관하에 개경뿐만 아니라 적현 6현, 기현 7현을 아울러 두었다. 현
종 9년(1018년)에 개성부가 폐지되고 개경5부와 경기지역이 분리됐지
만 한국사에 「경기」라는 지리적 관념이 생긴것은 이때가 효시라는 것.

개경은 동서남북중의 5부와 그 밑에 35방-344리 등으로 각각 나뉘
어 관리됐다.

한편 고려의 인구에 대해 박교수는 현재까지 통설로 인정되고 있
는 210만명설에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210만명설은 중국측 사료인
「송사」 권 487 열전 고려전의 말미에 고려의 인구가 「남여이백십만구」
라고 한데서 기인한다. 이 자료는 고려의 인구수를 전하는 유일한 기
록.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느시기의 인구수인가 하는 점이 불명확하고
대국으로 군림하던 중국측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제약성을
갖는다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박교수는 송나라 사절인 서긍이 견문록으로 남긴 「고려도경」에서
고려 군사수를 60만명이라고 한 점에 착안, 고려인구를 250만∼3백만
명으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교수는 60만군사 이외에 군역에서
제외된 19세 이하와 60세 이상의 연령층인구, 귀족들과 노비, 환자등
을 포함하면 남성 인구는 병역부담자 숫자보다는 많아질 것으로 추정
했다. 고려때는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점을 감
안,고려의 전체 인구를 250만∼3백만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박교수는 또 수도 개경의 인구를 50만으로 추산했다. 이는 「고려
사절요」 권16에 의 침입에 즈음하여 고려 중신들이 모여 천도문
제를 논하는 대목에 「경도의 호수가 10만에 이른다」는 기록에 근거를
둔 것. 「성곽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말이 뒤이어 나오는 것으로 미루
어 1호를 5명으로 계산하면 개경인구는 50만. 하지만 개경은 인구밀
도가 1㎢당 2만명이 넘는 엄청난 조밀지역이 된다. 때문에 박교수는
이 10만호에는 성외에 살다가 비상시국에는 성내로 피난할수 있는 가
호도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