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아담에게 사물들을 지배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그 신은 누
가 인지한 신이었을까. 이브는 그 자리에 없었을까, 아니면 성서 기록
자가 그녀를 빠뜨린 것일까.
나에게 「이브」의 이름은 여자의 이름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인류 이름으로 신 앞에 섰던 것이지, 남자의 이름으로 신 앞에 섰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브는, 아담이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이해
하던 그 순간, 즉 「나」를 「나 아닌 모든 것」의 원수로 인지하는 순간
쫓겨난 모든 「아닌 나」, 현대철학이 「타자」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존재
의 이름이다.
탈현대성이 논의되면서 철학은 반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논의
한가운데에 당연히 자아와 주체의 문제가 놓여있다. 푸코와 라캉, 데리
다등의 사유 근원은 바로 「타자」를 규명하는 데 바쳐진다. 그러나 이
스타급 철학자들 뒤에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않은 조용하고 사려
깊은, 그러나 앞선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긴 철학자가 한명 숨어
있다. 유태계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철학은 꾸준히 자아와 타자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국내에
레비나스를 소개하느라 거의 홀로 애써 온 강영안교수가 번역한 「시간
과 타자」(문예출판사)는 짧은 책이지만, 놀라운 깨달음과 위안을 준다.
모든 논의는 존재 불안에서 시작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순수한 무
란 없다. 아무리 상상적으로 궁극까지 밀어 가 보아도, 결국 「있다」는
사실은 남는다. 그 「있다」는 사실의 무참함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레비
나스의 자아는 「홀로 있음」을 견디는 상황으로 자신을 밀고 나간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고독」은, 개별자의 무기력한 수동적 견딤이 아
니다. 오히려 그는 그 홀로있음 안에서 타자를 발견한다. 나에게 손 내
밀어 주기를 요구하는 타자. 나를 섬기며 나에게 섬김을 요구하는 타자.
내가 끝까지전부다 알 수는 없는 타자. 그 신비한 타자는 레비나스에게
정복 대상이 아니라, 항유 대상이다. 그 항유를 통해서 자아는 타자를
환대하며 자아의 오만을 버린다.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남음이다. 타자는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다.
사르트르가 「타자는 지옥이다」라고 썼을 때, 그 말을 이해하느라고
골머리 썩을 필요없다. 지옥에 갔더니 너무나 길다란 젓가락을 들고 저
만 먹는다고 먹지도 못하고 비쩍 말랐더라는 우스갯소리만 떠올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르트르의 자아는 길다란 젓가락을 들고 쩔쩔매는
그지옥의 자아들이다. 레비나스의 자아는 길다란 젓가락을 들고 너 먹
여주고 또 나도 얻어먹고 통통하게 살이 찐 천국의 자아들이다. 「나 아
닌나」, 「알 수 없는 나」로 보송보송 해진 자아.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천국이다」.
레비나스 철학의 전복적인 성격은 「미지」를 철학의 장으로 끌어들여
논한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모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알레
르기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과학주의자들에게 이것은 철학적으로 대단한
투기일 수 있다. 아담 곁에서 신의 말을 달리 알아들었을 여자들에겐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련만. 따라서 레비나스가 이 「미지」에 대한 논
의에서 남성적 사유를 상쇄하는 여성적 사유의 특성을 읽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식의 바깥에서 가만히 미소짓는 타
자, 달아나는 것을 더욱더 쉽게 환대하는 존재들. 아니, 어쩌면 달아나
는 존재 그 자체인 인류의 타자들.
겸손 위에 구축된 새로운 인간학을 써낼 존재들. 그의 글을 읽다보
면, 그렇게 가슴이 차오른다. 아, 이런 철학도 있구나….
< 시인 · 상지대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