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실답실 돋은 수염」 「은근한 당길속(가지고 싶은 마음)으로 만져보는
만년필」 「오징어 반부드기(반쯤 부둑부둑하게 마른 물건)」 「키만 껑충한
싱검쟁이(싱거운 소리를 잘하는 사람) 총각」 「눈 위에 아막아막하게(자욱
이 꼭꼭 찍은 듯 나있는 상태) 난 노루 발자국」 「이불깃이 타슬타슬해서
(가장자리가 매끈하지 않고 조금 거칠어서)」….
재야 국어학자 박용수(62)씨가 최근 펴낸 「겨레말 용례사전」을 들추다
보면 『우리말이 이렇게 다양했던가』 새삼 놀라게 된다. 7만여자의 뜻과
용례가 실린 이 사전에서 한자어나 외래어는 찾아볼 수가 없다. 어감에서
부터 존득존득 착착 감기는 순수 우리말만 올라 있다. 이 중 많은 수는
웬만한 국어사전에는 올라있지도 않은 말들이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말들을 수집하셨어요?』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주변에 다 흩어져 있어요. 여기 실린 것은 내가
수집한 것 중 반밖에 안됩니다.』
박용수씨는 자신의 작업을 『죽어가는 우리말을 건져내는 일』로 표현한
다. 「말 수집가」 박용수씨는 그러나 열일곱살 때 장티푸스로 청력을 잃어
말을 들을 수 없는 몸이다. 문학작품을 읽다 신선한 우리말을 대하면 그
때그때 메모해두고, 북한·연변에서 나온 사전까지 모조리 뒤진것이 사전
의 바탕이 됐다. 처음 대학노트에 정리하기 시작한 낱말들이 이제는 매킨
토시 컴퓨터에 모두 입력돼 있다.
『남북한과 해외동포까지 7천만 겨레가 함께 쓸사전을 만들자』는 의욕이
결실을 맺었다고 그는 말한다. 서울 종로 3가 뒷골목에 자리한 「한글문화
연구회」 사무실. 그가 먹고 자면서 우리말을 수집·정리하는 장소다. 사
무실에 들어선후 어떤식으로 대화를 할까 머뭇거리자 그는 서슴없이 재활
용 종이를 내민다.질문을 반쯤 적어나가면 그의 대답이 곧 터져나왔다.조
금 웅웅거리는 소리이긴 하지만, 알아듣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 소리
를 잃은지 50년 가까운 그가 육성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게 놀라웠다.
『계속 말을 하니까 안 잊어버려요. 목청도 기계와 같아서 자꾸 써야지
요.』 자신에 대해 『한마디로 저돌적』이라고 말하는 그는 듣지 못하는 좌
절감에서 일어선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고 한다.
//// 듣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다변 ////.
우리말뿐 아니라 사회 현상 전반에 관심이 많은 그는 누구보다 다변이
었다. 낮시간 동안 그의 사무실은 여러 사람의 안식처 노릇을 한다. 인터
뷰중에도 서너 사람이 그를 만나겠다고 와서 기다릴 정도. 70∼80년대 함
께 재야운동을 했던 국회의원에서부터 대학생, 장애인, 철거민 등 각양각
색의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그는 이들 모두를 품어안는 넓은가슴이다. 『한
말씀 해주십시요』라며 찾는 젊은이에게도 그는 굳이 무거운 이야기를 하
지 않는다.
『막걸리나 한잔 사먹이며 너 술버릇은 어떠냐고 묻지요.』 대단한 인생
철학보다는 몇시에 일어나고 아침에 자기 앞마당은 쓰는지, 그런 사소한
생활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어느 국어학자도 해내지 못한 작
업을 하면서, 이런 사람들에게 시간 뺏기는 것이 아깝지는 않았을까. 그
는 도리어 『그들이 내가 있게 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마음을 열고 여러
사람과 만나기 때문에 이만큼 건강한 거예요. 사람 기피하고 신경 예민한
사람들 보니까 꼬장꼬장 말랐더군요.』 그는 문학도 결국 사랑을 빼고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고 말한다. 정작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은 한밤이
되어서여서 그가 잠자는 시간은 하루 3시간을 넘기는 법이 없다. 사전을
만드는 동안 간이침대를 놓고 자던 그는 얼마 전 아예 사무실 한 켠을 잠
자는 공간으로 꾸몄다. 『주로 막걸리만 마시니 짧아도 푹 자고, 깨면 말
짱해요.』 맥주를 마시면 갈증만 심해진다고 그는 말한다. 『저 사람 저거,
그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주변 사람들은 그가 고집과 끈기, 정열
어디에서도 지지않는 「놀라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 장시 쓰면서 시작한 우리말 탐험 ////.
재야 국어학자는 그가 80년대 들어 얻은 이름. 그 전에는 시인이자 사
진작가, 재야 운동가였다. 꼭 어울릴 것 같지 만은 않은 이런 경력을 두
고 그는 『결국 하나의 길을 걸었다』고 말한다. 그가 시를 발표한 것은 60
년부터.
80년대 들자, 이렇다할 시 한편 못 남기고 있다는 반성이 든 그는 『원
고지 2천장짜리 장시를 쓰겠다』고 공언하고 방에 틀어박혔다. 『내가 엽전
이니 엽전 글로 써야지.』 순수 우리말로만 쓰겠다는 생각에 술까지 끊고
몇달을 꿍싯거렸지만, 8백장을 쓰고는 넉장거리로 나자빠졌다. 평생 걸쳐
줍고 모은 우리 낱말이란 것이 2백자 원고지 8백장에 깔고나니 바닥이 들
어난 것.
일단 시집은 냈지만, 처음 약속을 지키려면 우리말을 더 모아야 할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실하다는 큰 사전을 갖다 놓고 1년동안 뒤졌
다.
『한번 사전을 뒤져 보십시요. 하루에 몇장이나 볼 수 있는지.』 글 쓰다
막힐 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문용 사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내놓은
게 우리말 갈래사전. 89년 내놓은 이 사전에 대해 그는 『나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몸과 행위, 마음, 의·식·주생활, 농업,
어업, 광공업, 상업, 천문, 지리, 동식물, 의태어, 의성어 등 우리말을
쓰임새별로 모아놓았다.
그런데 일이 커졌다. 『사회적으로 떠들썩해지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
도 하나둘 눈에 보이니 그만 발을 뺄 수가 없더군요.』 우리나라 사전을
이 구석저구석 다 뒤져 찾은 순수 우리 낱말은 3만6천여개. 몇천년 동안
한가지 말만 써온 언어공동체로서 이것밖에 안될 턱이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에 오르지 않은 토박이말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우선 이걸
살려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년대 문인들은 우리말을 얼마나
풍부하고 맛깔스레 썼습니까. 한자에 토를 달아 읽는 일제시대 교육이 생
활용어에서까지 우리말을 내쫓았지요.』 그는 서울 중류층이 쓰는 말을 표
준말로 삼은 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도 한 원인이라고 본
다.
『서울 중류층이라면 「문자」를 써야 체통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던 반
국어적 계층이 아닙니까?』 우리 사전에는 「화톳불의 평북 방언」으로 처리
돼 표준말에 올라있지 않은 「우등불」이란 낱말이 있다. 그는 그러나 화톳
불과 우등불은 서로 다른 뜻을 지닌 별개의 낱말이라고 지적한다. 화톳불
이 작은 솔가지 같은 것으로 피우는 불이라면, 우등불은 밤에 벌목할 때
주변을 밝혀줄 정도로 크고 환한 불이라는 것이다. 각지방의 풍물에 따라
생겨난 이런 낱말들을 방언이라 내치면 그 지방문화도 함께 무시하는 게
아니냐고 그는 묻는다.
범민련 보도실장으로 시위현장마다 쫓아다니며 사진기를 들이대던 그는
수없이 많던 카메라까지 처분하고 우리말 되찾기에 매달렸다. 그렇게 나
온 작품이 93년 출판부에서 출간한 「겨레말 갈래 큰사전」. 뜻만
나와 있는 사전으로는 작문에 활용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다시
내놓은 것이 「겨레말 용례사전」이다. 처음에는 문학작품 속에 나온 용례
를 인용할까 생각하다 7만여 낱말의 용례를 직접 지었다. 『아무리 우리말
을 풍부하게 사용한 작품들을 모아도 용례를 다 찾아낼수는 없더군요. 예
문이 너무 길어도 안될 것같아 아예 제가 짓기로 했지요.』.
이 일의 마무리와 함께 그는 또 새로운 일을 꾸미고 있다. 새 세대에게
우리말 가르치기. 4∼5세부터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과 고학년 등 단계
별로 나누어 우리 낱말을 가르치는 교재 「겨레 얼 가꾸기」를 집필중으로,
유치원이나 놀이방 등의 교재로 사용하게 할 생각이다. 『그동안 사전을
만들면서 「이걸 몇명이나 볼까」하는 회의가 끊임없이 들었어요. 언어습관
이 굳어지기 전인 어릴 적부터 어휘를 풍부하게 해 「새로운 언어세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 거지요.』.
//// 6.25 때 장티푸스로 청력 잃어 ////.
그의 우리말 사랑은 따지고 보면 중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4
년 마가을(가을걷이가 마무리될 무렵의 가을) 경남 진양군에서 태어난 그
는 장난꾸러기에 독서광이었다. 소설에 미쳐 날 밤을 새우고 시집을 끼고
다니던 중학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그에게 시조를 써오라고 했다. 옥편
까지 뒤져 찾은 어려운 한자를 섞어 시조를 썼는데, 선생님은 『어디 이게
네가 지은 글이냐. 중국글에 토만 달았지』라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시인
이 되겠다고 뜻을 세운 후 쉼쉼이 토박이말을 모은 것도 이 때문. 그는
『우리 시라면 지은이 이름만 빼면, 순수 우리말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
다.
이 터지던 50년 진주고 2학년 때 그는 일생일대의 시련을 겪는
다. 장티푸스로 고열에 시달리다 그만 청력을 완전히 잃은 것. 귀는 방
향과 균형감각까지 관장한다는 것을 비틀비틀 일어서지도 못하게 된 그때
서야 깨달았다. 귀가 닫힌 후 바람소리, 밤새소리, 어머니 한숨소리에서
젖먹이시절 소리까지 환청으로 들려왔다. 『누워 있으면 저벅저벅 친구들
이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어요.』 친구들은 죽죽 상급학교로 나가는데, 혼
자 뒤처지는 것같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3년을 그렇게 방황하다 그는 일
어섰다고 한다. 그 힘이 무엇인가고 묻자 그는 『간단해요. 죽기 아니면
살기죠』라고 답한다.
고향에서 사진기술을 배운 그는 70년 허바허바 사진관 기사로 취직해
서울로 올라왔고 사진관도 개업했다. 사진기사로 있는 동안 견습생들의
부당한 처우에 분개해 노조를 만들었던 그는 70∼80년대 시위현장을 쫓아
다니며 현장사진을 찍은 사진작가로도 유명하다. 주요 일간지뿐 아니라
「타임」 「라이프」 등 외국 잡지에서도 그의 사진을 가져다 썼을 정도.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참여한 그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전국민족문주운동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재야단체에서 활동했다. 고
문익환 목사나 씨 모두 그와 우리말 사랑을 나눴던 친구. 『만나면
서로 얼마나 우리말을 많이 아나 문제를 냈는데, 저도 못맞출 때가 많아
요.』.
그 시절에 대해 그는 『지났어야 할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때 굳어진
민족이나 민중에대한 사랑, 신념이 사전 만들기에도 그대로 드러났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말은 알면 알수록 무한한 애착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
어요. 어떤 사물이나 생각이든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찾아보면 있
어요. 요즘 사라져가는 말은 우리말이고, 생기는 것은 한자, 외래어, 조
잡한 신조어들이니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그 세대가 어떤 말을 쓰느냐
하는 것은 자연적인 흐름이라고 말하는 그는 『그 물줄기를 돌려놓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
술이 들어가면 욕쟁이로 변하는 그는 요즘 갈래사전에 「욕」 항목도 집
어넣기 위해 수집중이다. 『양반 앞에서는 오장육부가 뒤틀려도 아무소리
못하다가 돌아서면 욕부터 해대는 게 옛 상놈들의 삶이죠. 욕을 통해 계
층적 스트레스를 푼 겁니다. 일제시대와 독재로 내내 눌려 살았으니 우
리민족 전체가 욕쟁이가 됐다고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쩌다 보니 우리말 연구에 빠졌다는 그에게 시는 언제 다시 쓸 거냐고
물었다. 『인생에 연륜이 쌓일수록 시도 깊어지는 것 아닙니까? 한 칠십쯤
되면 제대로된 시를 쓸 것 같아요. 그렇게 초조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고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