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백년간 러시아속국...92년부터 내전 돌입 ###.
한국분단의 원흉 스탈린의 고향인 그루지야 공화국이 분단의 고통
을 맛보고 있다. 23일 그루지야-압하지 경계선인 인구라강 대교 근처에
는 수천명의 압하지 난민들이 집결, 『강제분단 총선 중지』 『그루지야-압
하지통일』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23일 압하지 반군측이 실시한 압하지 총선에 반대하기 위한 것.
이들은 전날인 22일 압하지 난민촌인 갈리지역에서 두차례 폭발이
일어났는데, 이는 난민들을 총선에 강제동원하기 위한 압하지 반군측의
협박이라고 주장했다.
『그루지야 정부측에 의해 동원된 것 아니냐. 압하지군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한국기자임을 확인한 이들은
『블라디슬라프 아르진바(51·압하지 반군 대통령)는 그루지야의 김일성』
이라고 대답하며, 『민족해방이란 명분하에 민족을 말살시키고 있는 점이
똑같다』고 말했다.
그루지야는 2천5백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민족. 4세기 경에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10세기에 그루지야 왕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13세기 침략으로 비극이 시작됐고, 15세기에는 페르시
아와 오스만 투르크 같은 이슬람제국의 침략이 계속됐다. 이로 인해 12세
기 1천만 인구를 가졌던 그루지야는 18세기말 80만으로 줄어들 정도로 멸
족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 민족생존책으로 러시아와 맺은 협정이 1783년 「게오르기에프
스키 협정」. 그루지야 왕국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러시아 제국에
편입한다는 협정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1801년 그루지야를 완전합병시켰다. 그리고 그
루지야는 1917년 10월 혁명 와중에 3년여 잠시 독립국가로 존재했던 기간
을 제외하고는 줄곧 러시아의 속국으로 존재했다. 그러던 중 1991년 소
련 붕괴를 틈타 다시 독립을 쟁취했다. 즈비에드 감사후르디아 초대 대
통령에 이어 92년3월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전소련 외무장관이 정권을
잡았다.
그런데 또다른 비극이 시작됐다. 그루지야 북부 압하지에서 분리-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92년8월부터 그루지야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내전이 발생, 94년4월 러시아와 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맺을
때까지 약 2년동안 최소한 2만명이 죽고 25만명이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나서야만 했다.
압하지 반군측은 23일 총선을 실시, 압하지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
나 그루지야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25만 난민이 참가하지
않은 선거였을 뿐만 아니라 1당투표로 비민주적이라는 것.
압하지 출신의 그루지야 국회의원 아가 마르샤니야 여사는 『자유총
선을 통해 민주 압하지 정부를 구성하고 그루지야와 재통일하는 길만이
압하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반면 압하지 반군측 경비장교는 『민족분리운동은 세계적 대세』라며,
『그루지야와 압하지는 다른 민족』임을 강조했다.
인구라강 통행금지 이유를 묻는 질문에 『스파이 접근을 막기 위해
서』라고 대답했다. 이때 한 압하지 출신 할머니가 강을 건너게 해달라
고 애원했다. 딸의 해산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끝내 거절당했
다.【트빌리시(그루지야)=황성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