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두운 자본 물결 속에서도 돋보이는 정부 개발 의욕 ###.
『차오 민 덴 탄회 하노이(하노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늘빛을 닮은 남색의 아오자이를 입은 늘씬한 베트남 항공 여승무원
의 인사를 받으며 비행기 트랩을 내리는 순간, 서울과 2시간의 시차가 아
니라 70년대 서울로 여행을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서울서 떠난 비행기는
최신형 비행기였지만 공항 버스는 의외로 털털거리는 낡아빠진 중고 일본
제였다.
새 비행기와 낡은 공항버스. 베트남은 곳곳에서 이처럼 새것과 낡은
것이 함께 발견된다.
호치민시(옛 사이공시)는 환락의 도시로 변모한 90년대 자본주의 풍경
이었다. 반면 하노이는 혁명을 꿈꾸던 70년대 사회주의 국가 풍경 그대로
였다.
월남전을 『잊자』고 말하면서도 월남전 유물은 미군 인식표까지 『잊지
않고 있다』며 관광상품으로 팔고 있었다. 『혁명정신』을 내세우는 사회주
의 구호가 거리 곳곳에 나붙어 있었지만 이들의 생활 속에 파고든 자본주
의 「병폐」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 하노이에 부는 대형 건설 바람.
하노이시는 지난 20년간 자립경제 구호 속에 은둔했던 암울한 시절의
유산인양 거리 전체가 곰팡이가 슬고 퇴색한 우중충한 건물더미로 뒤덮혀
있었다. 특이한 것은 2, 3층으로 된 건물들이 모두 너비 4∼5m에 길이
20∼30m 크기의 직사각형 틀로 똑같이 찍어낸 듯하다는 것이었다. 집도
식량처럼 획일적으로 배급해주었음을 보여주는 사회주의 유물이었다. 단
조로운 직사각형 집은 방도 한두 개에 불과했다. 『방이 적어 과년한 딸들
과도 좁은 방에서 함께 사니 불편함이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 외국합
작회사에서 일한다는 디엠씨는 쑥스러운 듯 말꼬리를 감추었다. 그는 베
트남의 성개방 풍조가 아마 이런 비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도 큰 이유
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풍스러운 옛 프랑스 식민지 시절 주택들은
지금은 모두 호텔이나 외국 대사관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회색 도시에 사회주의 유산들을 부수며 대형 타워 크레인이
먼지를 일으키며 올라가고 있었다. 『하노이시에만 현재 대형 건물 50개
이상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3, 4층 건물이 고층으로 불리던 하노이시에
건설 바람이 분 것이지요.』 27층짜리 대형 「하노이 센터」를 짓고 있는 쌍
용건설 곽경식 현장소장의 말이다.
하노이에 그래도 이만큼이나 변화가 온 것은 베트남 정부가 강력하게
외국기업의 유치전략을 폈기 때문이다. 1986년 「도 무오이(개혁)」정책 이
후 외국기업들은 사회기반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자본주의 맛을 아는 호
치민시로만 몰려갔다. 하노이에는 별 5개짜리 특급 호텔도 한곳 없었고
도로 사정도 나빠 외국투자가들은 누구나 얼굴을 돌렸다. 『우리 공장이
하노이로 오게 된 것은 베트남 정부가 호치민시로 가면 허가를 안내주되
하노이로 오면 TV 브라운관 독점 생산권을 10년간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
입니다.』 오리온하넬사 김종락 사장의 말이다. 이처럼 하노이는 베트남
정부의 강권에 의해 모습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하노이 밤은 어두웠다. 그러나 이곳에도 자본의 물결은 서서히 파고
들면서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국영상점이 사라진 시장에는 각종 수입품
으로 가득찬 개인상점이 들어서 있었다. 한 신발가게는 간판에 태극기와
미국, 영국, 프랑스 국기까지 그려놓고 외국 유명상표를 모두 구비해 놓
았음을 과시했다.
『개인상점이 없는 사회주의 배급체제 속에서 살아서 그런지 이들은 단
골개념이 없어요.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자주 오면 오히려 더 비싸게
받거나 안좋은 물건까지 섞어주며 덤터기씌우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 유
학생 부인인 김영신씨는 이곳에 살면서 자신이 자본주의 전도사가 된 것
같다고 웃었다. 『단골집에 가서 이 상점이 번창하려면 단골들에게는 물건
도 싸게 주고 서비스도 좋아야 한다며 누누이 자본주의를 「전도」하고 다
니죠.』.
● 가난하게 만드는 전쟁은 이제 싫다.
동구가 그러하듯이 하노이도 개방과 함께 매춘이 생겨났다. 우리나라
심야 술집풍경처럼 커튼을 내린 채 술을 팔고 공안(경찰)이 오기 전에 미
리 전화로 연락을 받아 일제히 문을 잠근다는 것이다. 주인이 대부분 이
곳 실력자를 끼고 있거나 실력자가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노이시는 한국의 성장 경험을 배우기에 열심이었다. 도 무오이 서기
장은 하노이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들을 만날 때면 『 대통령 전기도
읽었다』며 『한국인들의 높은 성취욕으로 발전을 이루었듯이 한국이 우리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해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노이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전쟁 유적터인 북폭 현장을 가보았다.
1972년 12월18일부터 29일까지 12일간 미군이 에 투하한 원폭의
5배나 되는 10만t의 폭탄을 쏟아부었던 현장은 컴티엔 거리였다. 어릴
때부터 이거리에 살았다는 비엔(45)씨는 그날의 현장을 이렇게 말하고 있
다. 『밤 10시쯤 미공습이 시작되니 대피하라는 방송을 듣고 집 계단 밑에
숨어 있었습니다. 30여분간 미군 폭격기들이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리고
이곳저곳에서 집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나 24년 전의 옛
이야기를 하는 비엔(45)씨의 목소리에는 적의감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
히려 그는 『당시 미제국주의자 원수를 죽이자고 외치고 다녔지만 이제는
미국과 원수도 아니고 감정이 없다. 가난하게 만드는 전쟁은 싫다』고 말
했다.
이들은 정말 과거의 전쟁을 잊었을까. 옛 적군이었던 한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노이 군사박물관에서 『한국군이 포로가 돼 손
들고 나오는 장면의 사진이 있다고 하던데 어디에 있느냐』고 직원에게 물
었다.
이 직원은 『한국과 수교하면서 한국군 관련 유물과 사진은 모두 철거
해버렸다』고 설명했다. 과연 이들은 옛날의 적들을 잊은 것일까. 무역진
흥공사 박찬신 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작년 베트남 주요 신문에는 「과
거의 문을 닫고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자」는 기사가 자주 실렸습니다. 베
트남의 사회주의 혁명 완수를 위해서는 잠깐 과거의 문을 닫아주자는 의
미이지요. 필요할 때 언제라도 과거의 문을 열고 하나씩 들추어낼 수 있
다는 말이기도합니다. 올 초 한국 기업에서 노사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이
공의 한 신문은 「우리는 그들의 잔악성을 지난 전쟁 때 경험한 바 있다」
고 썼더군요.』.
옛 사이공시인 호치민시는 하노이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즐비한 고층건물, 넓게 잘 닦인 도로, 그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 행렬은
하노이시와는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다. 화려한 옷차림은 군복차림과 '무
캇'이라는 옛 월맹군 철모를 쓰고 있던 하노이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
계의 사람들로 보였다. 호치민시의 중심인 레로이 거리에 들어서자 호텔
과 나이트 클럽 등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하노이와 정말 한 나라인가
가의 심스러울 정도였다. 거리에 나서자 『원 달러』라며 소매깃을 붙잡는
구두닦이들이 지겨울 정도로 따라붙는다. 13세의 한 소년은 『영어를 어
디서 배웠느냐』고묻자 『거리에서 배웠다』며 히죽 웃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 돈버는 것이 낫다』며 소년은 『구두 닦기 싫으면 돈이라도 달라』고
말했다. 대낮인데도 아가씨가 윙크를 하며 관광객들의 손을 슬며시 잡기
도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서 이 거리는 온통 연인들의 거리로 변했다. 서
구의 거리에서 만나는 연인들보다 더 진한 애정표현을 나누고 있었다.
● 한국인들이 올려놓은 호치민 술집 팁값.
나이트 클럽 「여왕벌」. 사람 얼굴을 구분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조명이
어두웠다. 외국인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는 공간엔 대학생으로 보이
는 듯한 한국인 얼굴도 여럿이 보였다. 팁을 얼마 주어야 하느냐고 주인
마담에게 묻자 『이곳은 원래 10달러 정도였는데 당신네 나라 사람들 때문
에 20달러로 올라갔다』며 『마음대로 주고 가라』고 답했다. 밤 거리는 오
토바이를 탄 미녀들로 요란했다. 아오자이차림의 미녀들은 『맛싸(마사지)
30달러, 고우 미니호텔(GO MINI HOTEL)』을 외쳐댔다. 신종 콜걸들인 셈이
었다.
호치민시는 75년 월맹측에 의해 통일이 된 후 암울한 시대를 겪었다.
미국 등 서방국가에 협력한 사람들은 모두 재교육 대상으로 감옥에 투옥
되기도 했다. 하지만 베트남이 개방정책을 편 뒤 외국기업의 잇단 투자로
일자리가 늘면서 베트남 제1의 도시로 부활하고 있었다. 특히 자본주의가
되살아나 해외로 이주했던 베트남인들의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이 도시는
옛 이름인 사이공으로 다시 불리우고 있다. 회사 상호 대부분에 사이공이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버스 행선지도 호치민 대신 사이공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호치민시의 원동력은 높은 교육열에 있었다. 거리마다 영어·일
어학원 간판이 즐비했다. 호치민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 미국 기업에
취직한 땀(24)씨는 『회사일이 끝나면 곧바로 대학에 가 경영학을 또 공부
하고 있다』며 『미국 기업에서 배운 무역 지식으로 회사를 차리는 것이 꿈』
이라고 말했다.
흔히 베트남은 우리의 60, 70년대 개발시대와 닮았다고들 한다. 그러
나 많은 사람들은 『베트남은 현재 못살고 있다는 것을 빼놓으면 우리보다
훨씬 유리한 여건』이라고 지적한다. 세계 3대 쌀 수출국일 정도로 식량이
풍부하고 석탄, 석유자원도 많다. 앞으로 석유가 개발되면 베트남은 엄청
난 도약이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베트남 전 교민 회장인 이순흥씨는 『그
럼에도 우리나라 일부 투자가들은 마치 월남 주둔군처럼 베트남 사람들을
깔보는 듯한 행동을 보여 노사분규를 일으킬 때가 많다』며 『이 때문에 일
부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사람을 가리키는 남주띤(남조선) 대신 남주디엔
(미친 놈)이란 말로 경멸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베트남은 개발도상국으로는 보기 드물게 안정 속의 성장을 이
뤄경이적인 국가라고 일컬어진다. 인플레는 10% 이내이고 환율이 안정돼
달러의 암시세가은행 시세를 밑돈다. 때문에 오히려 적당한 인플레가 필
요하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이다. 이렇게 베트남은 다시 부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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