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보트는 러시아, 타노프는 , 로드는 중국 「전공」 ###.


미국 국무장관은 대통령, 부통령, 하원의장에 이어 권력을 승계받는
미국내 서열 4위 자리이다. 초대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이 3대 대통령
에 오른 것을 비롯, 미 건국 초기 국무장관직은 으로 가는 징검다
리로 인식됐다. 현재도 미 국무장관은 지구본을 놓고 세계 경영 전략을
구상하는 막강한 인물로 꼽힌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장관은 국무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중동 장관」이
라고 일컬어진다. 크리스토퍼가 , 아이티, 북한 문제 등 산적한
외교 현안을 제쳐두고 중동 지역만을 돌아다닌 것을 빗댄 별명이다. 캘
리포니아 변호사 출신인 크리스토퍼는 천성적으로 모험을 싫어하고, 자
신이 결과를 점칠 수 있는 영역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카터 행정부
당시 국무부 부장관을 역임한 크리스토퍼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이르
기까지 중동 평화 문제를 다룬 경험이 있고, 더구나 중동 회담 구도는
부시 행정부가 이미 기본 틀을 마련해 놓은 터라 크리스토퍼로서는 가장
구미가 당겼던 것이다.

크리스토퍼 장관이 방기해 버린 여타 지역 현안들은 자연스레 다른
국무부 관리들 몫이 됐다. 장관이 정점에 서서 모든 지역을 통솔하는 대
신, 현안별 담당제가 도입된 것이다.

● 크리스토퍼, 중동지역만 다녀 「중동장관」 별칭.

스트로브 탈보트 부장관은 전공인 러시아 지역에 전념했다. 탈보트는
학창 시절부터 러시아 연구에 빠져들었다. 탈보트의 룸메이
트였던 대통령은 『탈보트가 흐루시초프 연설문을 번역하느라 밤
을 새는 동안 나는 밤참 만들어 바치기에 바빴다』고 회고한다.
시절에는 19세기 러시아 서정 시인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73년 시
사주간지 타임의 국무부 출입 기자를 시작한 이후에도 탈보트의 관심은
온통 러시아였고, 10권 가까운 러시아 관련 저서를 가지고 있다.

행정부의 러시아 정책은 「오직 」이라는 구호로 요약된다.

민주적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탈보트의
철학에 따른 것이다. 93년 12월 러시아 의회 선거는 탈보트로서는 악몽
이었다. 극우주의자 의 강세에도 불구하고 탈보트는 예고르
가이다르가 이끄는 개혁 세력이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결과는 지
리노프스키의 압승이었다. 공화당 의원들이 「 친위 세력」 탈보트
를 맹공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대통령은 탈보트에게 변
함없는 신뢰를 보내주었고, 올해 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함으로써 미
국의 러시아 정책은 그럭저럭 합격점을 얻게 됐다.

피터 타노프 정치 담당 차관은 국무부 내 서열 3위에 해당한다. 61년
정통 외교관으로 첫 발을 디딘 타노프는 독일, 프랑스, 등에
서 근무한 유럽통이다. 타노프가 에 관심을 쏟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93년 5월 대통령은 에 무기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크리스토퍼 장관을 유럽에 보내 우방을 설득케 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가 유럽행 비행기를 탄 순간 의 결정은 흔들려 버렸다. 크리스토
퍼장관이 체면을 구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보도진은 타노프 차관에게
『미국의 정책이 변한 것이냐』고 물었다. 타노프는 즉석에서
『미국은 개입을 최소화하고, 유럽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
도록 유도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크리스토퍼는 평
소답지 않게 격노하면서 『미국의 대외 정책은 대통령과 내가 정하는 것
이지 다른 국무부 관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괘씸죄」에 걸
린 타노프는 이후 이렇다할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평이다.

티모시 워스 글로벌 이슈 담당 차관은 국무부에서 목소리 큰 이단자
다. 행정부 출범과 함께 새로 생긴 그의 직책 담당 업무는 환경,
인권, 여성 등 사회 현안의 국제적 협조다. 콜로라도주 상원의원 출신인
워스는 가는 곳마다 『남자가 할 일은 정치라는 식의 낡은 사고방식을 국
무부는 집어 던져야 한다』고 「패러다임 변화」를 외치고 있다. 당연히 그
의 관심 사항은 수질 오염, 멸종 위기 동물, 생태계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고, 「동물 정자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고민거리 중 하
나다. 그러나 국무부내 정통 외교관들은 『워스가 별 이상한 일을 한답시
고 아까운 외교 예산을 까먹는다』며 못마땅한 분위기다.

얼마전 한국을 방문했던 윈스턴 로드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국무부
내 「중국통」으로 꼽힌다. 주중 대사를 역임한 전력에, 중국계 부인을 둔
탓인지로드의 관심은 온통 중국에 쏠려 있다는 것이다. 로드가 외신 기
자들과 회견하는 날이면 대만 기자들이 몰려들어 질문을 독점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로드 차관보는 크리스토퍼 장관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것으로 알
려지고 있다. 93년 의회 인준 청문회에서 크리스토퍼 장관은 『로드와 같
은 유능한 외교관에게 미국의 중국 정책을 맡길 수 있게 된 것은 행운』
이라고까지 말했을 정도다.

행정부는 스타 외교관 두명을 탄생시켰다. 골칫거리였던 보스
니아와 북한문제를 해결한 리처드 홀브룩, 로버트 갈루치가 그들이다.현
재는 두 사람 다 국무부를 떠났지만 여전히 미국의 ·북한 정책
은 이들이 만들어 놓은 해법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 국무부가 배출한 스타 홀브룩·갈루치.

홀브룩은 민주당 행정부에서는 드물게 철저한 「힘의 외교」를 주장하
는 현실주의자다. 94년 8월 유럽 담당 차관보로 임명된 그는 우선 내부
투쟁을 통해 행정부 내 「이상주의자」들을 잠재웠다. 이후 홀브룩은 「1인
외교」로 사태 가닥을 잡아나갔다. 95년 9.10월 두달 동안 거
의 매일 워싱턴 유럽 를 오간 끝에 그는 마침내 11월 1일 보스
니아 세 내전 당사자들을 주 데이튼에 마주앉게 하는 데 성공했
다.

지난 5월 국제 관계 대학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로버트 갈
루치가 북한 문제에 개입하게 된 것은 묘한 상황 논리 때문이었다. 93년
초 북한이 돌연 NPT 탈퇴를 선언했을 때, 미 국무부는 당시 정치 군사
담당 차관보였던 갈루치를 대북 협상 책임자로 내세웠다. 원칙대로 하자
면 동아태 지역 담당 차관보가 전면에 나서야 했지만, 핵 카드를 통해
미국과 직접 대화채널을 만들려는 북한의 의도를 사전 봉쇄하기 위해,
지역 전문가 대신 핵 확산 방지 전문가를 선택했던 것이다.

갈루치는 북한 핵 문제를 통해 일약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했다. 한
반도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93년 여름, 전세계 언론은 갈루치 대사의 한
마디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 고위 관계자들
은 차관보급인 갈루치 대사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 갈루치 대사
는 남북한이 서로 양보하기 힘든 상황에서, 교묘하게 「회색 지대」를 형
성하는 방식으로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 합의는 한
국처지에서 여러가지 불만스러운 부분을 남겼지만, 현상 유지를 한반도
정책 개념으로 추구하는 행정부로서는 최선의 해법이었는지도 모
른다. 홀브룩 갈루치 두 사람은 나 한반도 상황이 다시 위기로
치달을 경우 언제고 무대전면에 재등장할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