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귀순자들 증언...거의 광부-벌목공으로 강제노역 ###.
6.25때 인민군에 포로로 잡혀 송환되지 않았던 국군포로 11명의
북한내 생존사실이 그 이름과 함께 거주지역까지 밝혀져 충격을 던져
주고 있다. 또북한에 억류 중 숨진 국군포로 9명과 60년대 말까지 생
존이 확인됐던 11명등 총 31명의 명단과 함께 국군포로들이 광산지대
와 임산사업소 등지에 집단으로 분산 억류됐던 거주지 등 국군포로의
「전후 실태」가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주간조선 취재팀이 올 7월
탈북한 동용섭씨와 작년12월 탈북한 이순옥씨, 94년 탈북한 국군포로
출신의 조창호 전 육군소위 등 10여명의 탈북자와 귀순자증언을 종합
취재해 밝혀냈다. 북한에 생존하고 있는국군포로의 명단과 자세한 억
류지역등 국군포로의 구체적인 행적과 실상이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
음이다.
북한은 6.25 전쟁 중 6만5천명의 국군포로를 잡았다고 발표했으
나 1953년 휴전협정 조인때 막상 송환된 국군포로는 8천333명에 불과,
그동안 5만6천여명이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
지 취재 결과 현재까지 명단이 확인되고 있는 국군포로 31명 중 생존
자는 11명. 함경남도 단천시 검단-용양광산의 이보영 이응구 오창근
주진금 김선란, 함경북도 온성군 온탄과 온성군 풍서리의 김경조 이
종구 김종운, 자강도 만포-호하광산 등의 이창순 송정현-강영환씨 등
이다.이와 함께 60년대 후반까지 함경북도 아오지 감옥에 갇혀있다가
출소했으나 이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경우가 11명. 김춘례 김용태
김명곤 하유석 김상희 김우석 고시철 이진길, 66년 흥남 비료공장과
평양 방직공장 등에서 일하던 안건영 유만식 권영율씨 등이다. 이밖
에 수용소와 탄광에서 억류 중 숨진 것으로 확인된 사람은 김정태 박
종호 이학수 최재규 신장윤 장방선 정운필 임영택 김동규씨 등 9명이
다.
탈북자 및 귀순자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국군포로들을 억류, 강
제노역을 시켜왔던 수용소는 함경남도 단천시 검덕·용양광산, 희천
군 화풍광산, 함경북도 온성군 온성,주원,상화, 풍림탄광, 새별군 하
면·용북탄광, 은덕군 아오지탄광, 회령군 유선탄광,양강도(함경남도
일부와 평안북도 일부) 운흥군 운흥광산등 광산지대와 양강도 연사군
석수·신양·삼포임산사업소 등 임산사업소(임업사업소) 등지인 것으
로 밝혀졌다. 또 일부 국군포로는 간첩혐의 등을 받아 온성·청진 수
영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의 많은 국
군포로들이 함경도와 양강도, 평안도 일대 공장지대와 협동농장 등에
상당기간 동안 억류돼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함경북도 온성군 간부물자공급 소장으로 있다가 작년 12월 귀순
한 이순옥씨는 『71, 72년 2년동안 평안도지역에 수감되어 있던 국군
포로들이 온성군의 온탄·상화·주원·풍림 등 4개 탄광에 약 30∼40
명씩 약 150명이 배치되었다』고 밝혔다. 당시 온성군내 물자를 공급
하는 상업지도소 관리원이었던 이씨는 새로 배치된 국군포로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주는 업무를 맡아 이들을 또렷이 기억할 수 있
다고 말했다. 이씨는 온성군 이외에 새별군(옛 경원군) 하면탄광, 은
덕군(옛 경원·경흥군) 아오지탄광, 회령군 유선탄광,화성군(옛 명천
군) 명남탄광에도 국군포로가 대거 수용되었다고 밝혔다. 이씨는 당
시 함경북도 도청에서 열린 각 시군 상업관리소 지도원회의에서 새로
배치된 국군포로들에게 배급할 물량을 결정해 주는 과정에서 이 사실
을 알게됐다는 것. 이씨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잘아는 국군포로로 『온
성탄광에서 소달구지로 물자를 배달하는 일을 맡아 업무상 나와 이야
기를 나눌 수 있었던 김종운씨와 온성군 풍서리 친정집 부근에 살고
있는 김경조, 이종구씨가 있다』고 밝혔다. 충청도 출신인 김종운씨와
경상도 출신인 김경조씨는 각각 고향에 부인과 두 아들이 있고 이종
구씨는 충청도 출신으로 7남매 중 막내라는 것.
『고향에 있는 마누라는 첫날 밤 신었던 백고무신을 안고 나를 기
다리고 있을텐데…』라고 말하던 김종운씨는 『이곳에서 만난 「노친네」
(부인을 지칭하는 북한사투리)는 소용없어. 고향의 마누라가 나를 기
다리고 있을 거야』라며 부인생각에 젓곤 했다고 말했다 . 이종구씨는
술을 마시면 『살아서 부모님을 뵈어야 하는데 잘못을 저질렀다』고 통
곡했다. 그는 부모님이 군에 입대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 안들은 것을
후회하곤 했다는 것이다. 김경조씨는 『포로송환 때 보내주는 줄 알았
는데 우리 수용소에서는 한 명도 간 사람이 없었다』고 말해 북한에
남게 된 것이 자진 의사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었다고 이씨는 전했다.
이순옥씨는 자신이 중국을 거쳐 귀순하기 전까지 이종구씨 등 3명
이 온성군 풍서리에 계속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함경남도 단천시 용양 노동자구의 용양광산 광부로 일하다가 지난
7월 귀순한 동용섭씨는 단천의 검덕광산과 용양광산에도 3∼4천명 정
도의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다고 밝혔다. 동씨는 『검덕광산은 전체 광
부 4만여명 중 약 2천여명, 용양 광산 전체 광부 1만명 중 약 1천명
등 단천시 광산지대에 약 3천명 가량의 국군포로가 60년대 초부터 배
치됐다』고 밝혔다. 동씨는 용양광산의 국군 포로 중 이름을 기억할수
있는 사람으로 이보영, 이응구, 오창근, 주진금, 김선란씨 등 5명을
꼽았다. 이응구씨는 고향이 충청도로 군에 입대하기 전 고향에 부인
과 아들 2명이 있었다는 것. 오창근씨도 사병 출신으로 고향은 알 수
없으나 입대 전에 고향에 부인과 아들 2명이 있었으며 70대인 이보영
씨는 거제도에서 신병훈련을 받았다는 것. 김선란씨는 고향이
이고 주진금씨는 70대로 사병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평북 철산
광산에 광부로 집단수용되어 있다가 58년 용양으로 이동,용양과 검덕
의 철길공사에 동원된 뒤 이곳 탄광으로 60년대에 이주해왔다고 밝혔
다.
//// 단천 검덕·용양 광산에 3천여명 억류 ////.
단천시 검덕광산에 국군포로가 존재함을 확인해주는 다른 귀순자
의 증언도 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탈북자 김모씨는 『형이 결
혼할 때 장인 될 사람이 검덕광산 광부여서 신원을 캐보니 장인이 남
조선괴뢰군 포로병 출신이었다』며 『성분이 나쁜 여자와 결혼하면 사
회적 출세길이 막히기 때문에 가족들이 형의 결혼을 결사반대했었다』
고 말했다. 국군포로 출신들은 거주 이전과 여행이 통제되고 본인뿐
만 아니라 자녀들도 최하층으로 분류, 대학 진학은 물론 군입대도 불
가능하다는 것.
탈북자와 귀순자들은 전쟁 초기에 붙잡힌 국군포로들은 인민군이
나 중국군에 편입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부는 국군포로로만 이뤄
진 「22여단」, 노무자 부대인 「218부대」에 편성돼 비행장건설 등에 나
섰다가 군 포격을 받아 많이 숨졌으며 1956년 일제히 제대, 북한
공장이나 협동농장 농민으로 배치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조창호씨
처럼 일부는 감옥에서 서면재판을 받아 5∼20년형을 받은뒤 60년대말
에서 70년대 초에 석방, 탄광지대나 임산사업소로 배치되었다는 것이
다.
67년 조선 중앙통신사 기자로 일하다 귀순한 이항구씨는 『북한에
서 취재를 하러 돌아다니다가 국군 포로였던 휘문중학교 44회 동기생
인 안건영과 유만식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안건영은 흥
남비료공장에서 일했고 유만식은 평양 방직공장에서 일했다. 이들은
포로로 잡힌 뒤 포로로만 구성된 건설부대인 「218부대」에 편입, 비행
장 복구공사 등에 나섰다가 정전후 제대해 공장노동자가 되었다는 것
이다. 지난 94년 귀환한 국군포로 출신 조창호씨도 『내가 수용됐던
아오지감옥 등의 국군 포로들은 절반 이상이 병사했다』며 『감옥에서
출소한 사람들도 나이가 60대 후반에서 70대이상으로 많이 숨져 지금
찾기에는 너무 늦은감이 있다』고 한탄스럽게 말했다.
조씨가 기억하고 있는 국군포로는 모두 20명. 이 중 그가 생존을
확인할 수 있는 국군포로는 3명으로 탈북전 호하 광산에서 함께 있던
송정현씨와 만포의 이창순씨, 강계 부근 우라늄광산의 강영환씨라고
밝혔다. 송정현씨는 경상도 출신으로 일제시대 소화비행기 공장에서
일했으며 손재주가 좋아 지금도 목수일을 하고 있다는 것. 70년 화풍
광산에서 그와 함께 있다가 강계 부근의 우라늄 광산으로 옮겨간 강
영환씨는 충청도 출신으로 17년을 복역한 점으로 보아 장교였던 것으
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오지 감옥에서 출소, 현재 만포에 있는 이창
순씨는 서울 문리대 출신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고 말했다.
//// 이름 속인 채 사는 국군포로 많아 ////.
이밖에 조씨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측하는 국군포로는 8명. 아
오지와 만포, 강계 감옥에 있다가 출옥하거나 조씨와 함께 있다가 이
주한 사람들이다. 최광 인민무력부장의 처남으로 월남했던 육군 헌병
출신인 김상희씨, 북의 유력자를 친척으로 두고 있어 일찍 석방된 김
우석씨, 조씨와 같은 부대인 101포대 사병으로 함경도에 있는 친척들
이 감옥에 자주 면회를 왔던 고시철 이진길씨, 강계감옥에서 10년 만
에 출소한 경상도 출신의 김용태와 김명곤, 조씨와 함께 화풍광산에
있다가 자강도 농촌지역으로 옮긴 하유석씨 등이다. 또 호하광산에
있다가 간첩혐의로 체포돼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된것으로 짐작되는 임
영택씨는 육군 군악대 출신으로 서울이 고향이었다. 조씨가 감옥에서
사망한 것을 확인한 국군포로는 박종호 소령, 김정태 소령, 이학수소
위, 최재규 소위, 그리고 사병이던 김성두, 김성일씨 등 6명이다. 조
씨와 함께 화풍광산에서 일하던 신장윤, 장방성, 정운필씨 등 3명은
모두 호남출신 국군포로로 의형제를 맺으며 서로 가깝게 지내다가 70
년∼80년대 후반에 모두 죽었다. 조씨는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북한
에서는 통용되는 것이지만 포로신문을 받을때 이름은 물론 계급을 속
인 경우가 많아 이것이 진짜 이름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며 『국군 포
로들은 북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대해 좀처럼 이야기를 하
지 않고 서로 물어 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양강도 임산사업소에도 채벌공으로 국군포로들이 대거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평양 출신으로 양강도 연사군에서 고등중학교
(중·고교)를 나와 군 복무중 94년 귀순한 임영선씨(34)는 『국군포로
수백명이 연사군의 석수·삼포·소도 임업사업소 벌목공으로 일하고
있다』고 밝혔다. 임씨는 『내가 다녔던 연사군 석수 고등중학교만 해
도 학생 5백여명중 국군포로 출신 자녀가 약 40여명이 있었다』며 『친
구들끼리 싸움할 때 「남조선 괴뢰새끼 아들」이라는 말을 욕처럼 사용
해 국군포로들이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국
군포로 자녀끼리는 싸울때 『너희 아버지는 수용소에서 담요를 훔쳐가
고 밥도 훔쳐 먹었다』며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는 경
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임씨는 그의 친구였던 국군포로 출신 자녀들의 이름은 알
아도 부친 이름은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임씨는 또 『인근
의 삼포, 소도임업사업소에도 국군포로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다는 말
을 친구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국군포로들 중 일부는 광부나 공장노동자 등으로 일하다가 간첩
혐의나 불순한언동으로 정치범으로 체포돼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된 경
우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회령 정치범수용소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94년 귀순한 안명철씨는
『수용소 운수대 수리공으로 60대 노인 두 명이 독신으로 살고 있었다』
며 『이들은 6.25때 붙잡힌 남조선 괴뢰군 출신으로 사회생활을 하다
가 정치범으로 잡혀왔으나 현재는 착실하게 일하고 있다는 말을 수용
소 동료 경비병들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95년 러시아 벌목공으로 있
다가 귀순한 청진출신 허광일씨도 함북 청진시 수성구역에 있는 수성
정치범 수용소에 국군포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허씨는
『청진 보위부에 근무하던 친구로부터 남한에 송환되지 않은 포로 중
에 간첩 등의 혐의로 정치범수용소에 붙잡혀있는 사람들이 여러 명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북한은 국군포로를 전쟁중에 붙잡힌 정규군 출신과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던 카투사 출신, 6.25때 북파되었던 게릴라부대 출신 등 5∼6
가지로 나누어 놓았다는 것. 그러나 국군포로 출신들은 보위부에서
관리대상으로 선정, 거주 이전은 물론 보위부 승락을 얻기 전에는 인
근지역으로 여행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창호씨는 『북한에서 배치
받은 수용소, 탄광만 돌아다녀보았고 다른 곳은 전혀 가본 적이 없다』
며 국군포로는 「요감시 대상」으로통제된 삶을 살았다고 증언했다.
귀순자들은 그러나 당국의 무관심으로 이들 국군포로들에 대한 실
상이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귀순자는 『그동안
당국의 조사과정이나 언론 인터뷰에서 국군포로 문제를 제대로 캐 물
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북한 인권개선 운동본부 조성국 상담부장은 『미국은 정전 후 송환
된 포로와 당시 항공사진 등을 통해 끊임없이 포로와 유해들을 추적
하고 있으나 우리 정부는 그동안 국군포로 문제를 망각했었다』며 『나
라를 지키다가 포로가 된 그들을 국가가 책임지지 못한다면 앞으로
누가 국가를 위해 싸울 수 있겠느냐』며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특
히 조부장은 『북한이 이인모씨 북송에 이어 남한에 있는 미전향 장기
수들의 북송을 계속 요구하고 있는 현실에서 정부당국도 국군포로 송
환문제를 북한에 정식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