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문을 통해 드나든다. 물론 개도 문을 거쳐 드나들고 무형의
복이며 화며 병도 그 문을 통해 드나든다. 곧 문은 외계와 내계의 접점
으로서 좋은 일들은 잘 들게 하고 나쁜 일들은 들지 못하게 방해하려는
신앙이 깃들이게 마련이다. 초자연적인 힘인 주력으로 불행을 막으려면
그주력을 행사하는 그림이나 글을 문짝에 그려 붙여 겁을 줌으로써 들
지 못하고 돌아서게 하는 방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귀신 쫓는 전통적 수단이 비형랑이란 글을 써붙이거나 처용랑 화
상을 그려 붙이는 일이었다. 「삼국유사」 비형랑조에 보면 비형랑이 누
구이며 왜 그 이름만 보아도 불행을 몰아오는 귀신들이 겁 먹고 도망치
게 됐는가를 알 수 있다.

신라 진지대왕은 몹시 방탕하여 미모의 유부녀 도화랑을 탐내어 불
러들여 강요를 했다. 도화랑이 일부종사를 내세워 완강히 거절하자 「그
렇다면 남편이 죽으면 허락하겠구나」하고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도
화녀의 남편이 죽고 진지대왕도 죽었다. 한데 죽은지 20일만에 도화녀
의 꿈에 왕이 나타나 생전 약속을 들어 7일간 동침, 도화녀는 망령의
아이를 배고 달이 차 아이를 낳았다. 당시 진평대왕은 이 아이를 비형
이라 이름짓고 궁에 데려다 길렀다. 열다섯 살이 되자 비형은 밤중에
나갔다가 새벽 종이 울릴 때 돼야 돌아오는지라 미행을 시켰더니 경주
황천 언덕에 가서 귀신들을 이끌고 어울려 노는 것이었다. 임금이 불러
귀신 중에 똑똑한 놈 골라다 국사를 보필토록 했는데 그것이 길달이었
다.

그 길달이가 도망치자 귀신을 풀어 잡아다 죽였다. 그후부터 귀신들
은 비형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고 달아났다 한다. 이미 신라시대에 대
문짝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붙여 귀신을 물리치는 풍속이 있었다. 「여
기는 성제의 넋에서태어난 비형랑의 방이다. 뭇 귀신들이여 이곳에 머
물지 말지어다」.「삼국유사」에 보면 처용은 동해 용의 아들로 신라 44대
헌강왕이 데려다 궁에서 길러 미녀와 결혼시키고 높은 벼슬도 주었다.

모든 병을 관장하는 역신이 처용 아내의 미모에 반해 접근을 시도하더
니 어느날 처용에게 동침하는 현장을 들키고 만다. 일어나 무릎 꿇고
용서를 빌자 처용은 태연자약하였다. 그에 위압되어 역신은 앞으로 공
의 얼굴 형용을 문짝에 그려 붙이면 그 집안에 감히 들지 않겠나이다
약속하고 물러갔다.

이렇게 하여 불행을 몰아오는 액신과 병을 몰아오는 역신을 문전에
서 쫓는 문신으로서 비형과 처용이 정착한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이
상하게 탄생한 사람과 바다 건너온 이상한 용모의 외국인에게는 신통력
을 인정했으며 비형과 처용도 그같은 원시적 사고방식에서 탄생한 문지
기신들인 것이다.

조선조 전기 문헌 「용재총화」에 보면 섣달 그믐날 대문에 처용화상
을 그려 붙인 이외에 관모를 쓴 관인 투구를 쓴 무인 보석으로 장식한
부인, 그리고 호랑이나 닭을 그려 문짝에 붙이는 세화로 삼는다 했다.

우리 전통적 사고방식에서 불행이나 병은 귀신 소행으로 알았으며 그
귀신들이 무서워하는 사람이나 동물을 출입처에 그려두면 들지못한다고
알았음은 앞서 비형 처용에서 알 수가 있다. 항상 백성에게 군림하여
공포의 대상이 돼왔던 관리들은 백성뿐 아니라 병귀들도 무서워 도망쳤
다.

관인은 그래서 귀신이 무서워하고 무인은 궁시와 창검을 들고있기에
무섭다. 진보로 장식한 부인 화상을 붙인 이유는 귀신 다루는 다른 차
원에서 형성된 것이다. 겁을 주어 쫓을 수도 있지만 환대를 하여 흡족
시킨 다음 돌려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진보로 장식한 미녀와
문전에서 즐기고서 돌려보내기 위한 미소 작전이 부인 화상을 발상해낸
것이다.

호랑이 그림은 호랑이가 짐승 가운데 제일 무섭다 해서 공갈 효과를
노린것일 수도 있지만 호랑이는 음양설에서 대표적 양물 동물이기에 음
물인 귀신에 대치한 것으로 보이며 닭을 그린 것은 고대 중국에서 닭을
희생해 문에 매어 달았다가 후세에 닭 피를 문에 칠한 풍속이 전래한
것으로 보인다. 닭도 귀신의 활동을 보장해주는 어둠을 울음으로 쫓는
양물이기에 귀신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