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에 드러나는 충혈된 두 눈과 피로 범벅이 된 하얀 얼굴, 그리고 소
름끼치는 송곳니…. 여름철이면 지구촌 극장가에 나타나 건재를 과시하는
불멸의 스타 드라큘라의 모습이다. 트란실바니아로 그를 찾아
나섰다.
드라큘라 백작이 살았다는 드라큘라 성은 제2 도시 브라쇼브
에서 40여㎞ 떨어진 브란(BRAN) 지방에 있었다. 브라쇼브에는 드라큘라
성이 이미 당일 관광코스로 개발돼 있었다. 그러나 목적지로 가는 동안
마주친 풍경들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시한(?) 모습이었다. 영화
속에 나타나는 구름에 뒤덮인 기암절벽이나 늑대 울음 소리로 휩싸인 울
창한 숲 대신 밀과 옥수수 밭으로 이어진 전형적 시골 풍경들만
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브라쇼브를 출발, 1시간 정도 차를 달리자 운전사는 드라큘라 성에 다
왔다고 알려주었다. 차창 밖으로 뾰족한 탑 모양의 성이 눈에 들어왔다.
흡혈귀 전설과는 다소 동떨어진 너무나도 평이한 모습이다. 성 주변에 설
치된 넓은 주차장에는 유럽에서 온 듯한 관광 전세 버스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주차장 주변에는 드라큘라 백작 덕분에 살아가는 관광 상품 장사꾼들로
붐비고 있었다. 티셔츠와 인형 탈 등 관광 상품은 어느것 하나 예외없이
드라큘라 백작 초상화에다 「드라큘라의 키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드라큘라에겐 천적이라는 마늘과 십자가도 간간이 쇼윈도를 차지하고 있
었다. 드라큘라 백작을 세계 무대에 처음 소설로 내놓은 브램 스토커는
영국인이었다. 「5월 3일 비스토리샤에서 편지가 왔다」로 시작하는 소설
「흡혈귀 드라큘라」는 1897년 발간 직후 세기말 영국과 유럽 전역에서 베
스트셀러로 기록, 드라큘라 백작을 일약 세계적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드라큘라 성과 첫 인연을 맺은 사람은 영국인
이 아닌 독일인. 중세 독일 기사들은 브란 지방이 트란실바니아와 루마니
아 남부 발란시아 지방을 이어주는 전략 요충지라는 점에 착안, 1378년
드라큘라 성을 건설해성을 지나는 장사꾼들한테서 통행세를 뜯어냈다. 따
라서 독일인이 처음 성을 세웠을 때 성 이름은 「드라큘라」가 아니라 현지
지명을 본딴 「브란」이었다.
드라큘라 성은 유럽 다른 성이 그렇듯 언덕 위에 서있는 높이 50m 정도
의 성. 차우셰스쿠 공산정권 아래서는 박물관으로만 사용되다가 92년부터
외국인 관광객에게 문을 였었다. 매표소에서부터 드라큘라 성문으로 들어
가는 1㎞ 정도의 길 옆 곳곳에는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되레 무디게 하기
에 충분한 조잡한 조형물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드라큘라 성은 전체적
으로 볼 때 지하를 포함해 4층 구조물. 공산정권 붕괴와 함께 대규모 수
리를 시작, 현재 방 57개가 성 안에 들어서 있다. 그러나 드라큘라 백작
이 거주했던 침대와 성 한가운데 있는 우물에 관해서만 특별한 안내문이
있을 뿐 나머지 방들은 드라큘라 백작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전혀 알 수
가 없었다. 성을 구경하는 시간은 고작 한 시간 정도.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어두컴컴하고 살벌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고 무더위와 관광객들이
마시고 버린 콜라병들만이 뒹굴고 있었다.
역사에 따르면 드라큘라 백작은 실존 인물이다. 드라큘라 백
작 이름은 원래 브라드 테베스. 드라큘라라는 이름은 테베스 백작의 아버
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 역사서에 나타난 드라큘라 백작은 트란실
바니아 지방 내 우라키아 공국 성주. 그러나 백작은 성주가 되기 전 유년
시절 대부분을 에서 보내야만 했다. 당시 우라키아 공국이 트란실바
니아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의 속국이었던 탓에 왕자는 반드시
인질로 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어두운 유년기를 겪은 드라큘라 백작은 성주에 오르자마자 반오스만터
키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1461년 백작은 독일 상인 지지에 힘입어 오스
만에 대한 공납을 정식 거부하자 오스만터키군은 대군을 이끌고 트란
실바니아로 쳐들어왔다. 드라큘라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게릴라 전술로
대응, 오스만 병사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전쟁 과정에서 드라큘라 백
작은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방법으로 오스만 병사를 살해, 병
사만이 아니라 트란실바니아인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됐다. 드라큘라 백작
이 즐겨 사용했던 살해 방법은 고문으로 탈진 상태에 빠진 병사 목
을 베거나 펄펄 끓는 물에 넣은 뒤 창에 꽂아 거꾸로 매달아 두는 상상을
초월한 방법.
이렇게 죽은 병사는 2만여명. 어린시절 증오심의 결과라고 밖에
볼수 없는 드라큘라 백작의 이같은 잔인한 복수에 결국 주변 사람들마저
도 등을 돌렸다. 마침내는 내부 반란으로 발전, 백작은 12년간 유폐 생활
을 보내야만했다. 이후 드라큘라 백작은 와신상담 끝에 재기, 오스만
군에 대항해 한 차례 전쟁을 벌이게 되지만 결과는 무참한 패배. 드라큘
라백작 자신도 전쟁터에서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한 역사학자는 드라큘라가 내부 배반자에게 유폐되는 과정과
관련, 직접적인 원인이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는 설을 최근 내놓았다. 터
키병사와 싸우는 과정에서 백작이 트란실바니아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떠
오르자 백작과 경쟁을 벌이던 마차주 1세가 이를 시기, 백작과 신하 사이
를 이간질하는 과정에서 백작이 성주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주장이다.
현재 관광 당국은 세계 시장에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관광
상품인 드라큘라를 중점 육성, 드라큘라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곳은
모조리 개발하고 있다. 따라서 브란 성뿐 아니라 드라큘라 아버지가 살
았던 시기소아라와 드라큘라 사촌이 살았던 시비우, 드라큘라가 사냥할
때 자주갔다는 메디아스 등도 적당하게 윤색돼 관광객을 끄는데 활용되고
있다. 를 여행해본 사람들이 드라큘라 성이 2, 3개 있다고 말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러나 돈벌이에 혈안이 된 관광 당국과는 달리 인 대부분은
드라큘라가 의 트레이드마크인 것처럼 알려지는 데 대해 못마땅
해하고 있다. 「공산주의 때는 를 차우셰스쿠와 동일시하더니만
이번에는 웬 드라큘라」 하는 것이 인들의 정서이다. 이와함께 영
국 소설가가 「악의 화신」 드라큘라의 고향을 트란실바니아로 설정한 것은
인을 얕잡아보는 제국주의적 의도가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루마
니아인들에게 드라큘라는 공포가 아니라 분노로 와닿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국민 감정에도 불구, 분명한 것은 드라큘라 백작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민호 해외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