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협 7백리 시작되는 `기문' 강폭 100m로 좁아져 ###.
삼국지 3대 전투가운데 하나인 이릉의 싸움에서 오나라의 육손에 대
패한 유비가 물러와 죽은 곳이 백제성이다. 지금은 시멘트공장의 기숙사
에 가려 추녀만이 전망되는 백제성을 지나면 천하절경이라는 7백리 삼
협이 시작되는 기문을 통과한다.
이곳에서 3백∼5백m 되던 양자강의 강폭이 100∼150m로 좁아지고 물
살도 세진다. 기문을 지나면 단장갑이라는 전설의 나루터가 나온다. 「단
장의 미아리고개-」하듯 창자를 끊는다는 단장이란 말이 탄생된 현장이다.
진나라 환온이 배타고 삼협을 지날 무렵 하인 하나가 원숭이 새끼
한마리를 잡아 배에 태웠다. 이를 안 어미 원숭이가 비성을 지르며 수
백리를 주야로 뱃길따라 왔다.
이 근처에 이르러 배가 강변 가까이 가자 필사적으로 뛰어 배에 올
라탄 어미원숭이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환온이 그 어미원숭이의
배를 갈라보게하니 너무 애를 태운 나머지 창자가 갈기 갈기 끊어져 있었
다 한다. 이 단장 원숭이의 후예들을 삼협 강언저리에서는 찾아보기 힘
드나 바로 이곳에서 갈라져 흐르는 소삼협 수풀속에서는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며 이들에게 먹이를 주는 지방관리도 목격할수가 있었다.
소삼협 오지에 가면 후씨라는 성받이의 집단촌이 청나라때까지 있
었다 한다. 전설에 삼협 원숭이가 부녀자만을 납치해가 아이를 낳게하
는데 원숭이 모습을 하면 데리고 기르고 사람모습을 하면 갖다버리는데
그 버려진 야인들이 후씨라는 것이다.
삼협의 어원에는 이설이 많다. 큰 협곡이 세개있다해서 삼협이 아
니라 여기에서 「삼」은 셋을 뜻하지않고 많다는뜻으로 쓰인 것이라는 설이
있고 이 삼협에서 야인 미인 의인이 많이 난다해서 삼협이라는 설도있다.
연전 에서 지금도 소삼협 오지에는 문명과 행정권에서 벗
어나 야인으로 복귀한 향씨일가에 대한 르포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아들 하나만 낳아야 한다는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입산, 8명의 자녀
를 낳고서 온몸에 수염과 털을 기르며 짐승 잡아먹고 살고 있는 것이다.
삼협이 자랑하는 미인은 바로 삼협에서 갈라져 흐르는 향계에서 태
어난 비운의 미녀 왕소군을 가리킨 것일게다. 한나라때에는 궁정화가
로 하여금 궁녀들을 그리게하여 그 그림을 보고 사랑의 상대를 고르는 것
이 관례였다.
정략상 북방 오랑캐의 임금에게 시집보낼 궁녀를 화상으로 고르는
데 가장 밉게 생긴 궁녀로 짝짓게 했다. 작별인사하러 이 추녀를 본원제
는 들었던 찻잔을 떨어뜨려 깨었을 정도로 놀랐다. 천하일색이었기 때
문이다.
미녀가 추녀가 된것은 궁정화가들이 궁녀들의 뇌물을 받고 실물보
다 예쁘게 그리는 것이 관례인데 평소에 뇌물을 바치지않은 왕소군이기에
추녀가 된 것이다. 억울하고 화가치민 원제는 화가들을 모조리 죽여 저
자에다 효수시켰던 것이다.
왕소군의 고향인 보평촌에는 그녀가 그 샘물로 예뻐졌다는 남목정
과 열여섯살에 궁에 들었다는 것을 기념한 16계단의 소장대 곧 화장했던
둔덕만이 남아있었다. 삼협의인은 중국문학사 최초의 대시인이요, 충신
인 이 곳 태생 굴원이고--.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이 하자고 굳게 맹세한 도원결의
만 아니었던들 삼국지의 주인공들 말로가 그렇게 비극적이진 않았을 것이
다.
관우의 부음을 듣고 너무 흥분하여 반격을 서둘다 장비는 목을 날
렸고 제갈량이 이성적 행동이 아니라며 극구 만류한 것을 뿌리치고 10만
복수대군을 끌고 나간 유비도 그것이 죽음의 길에 발을 딛는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이끈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사지침에 「도적고폐」와 「이과
이중」이 있다. 이 두 병법이 바로 유비의 대군을 섬멸한 오나라의 무명장
육손의 이릉 작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잣집에 적이 들면 저항을 포
기한 체하고 재물을 쌓아둔 곳간으로 인도해 들여놓고 밖에서 문을 잠가
잡는 것과 작은 병력으로 지구전을 써큰 병력을 무력화시킨다음 기습격파
하는 작전이다.
유비는 무산 치귀 이릉 등 삼협 고을들을 차례로 점령,40개의 진지
를 구축 포진하고 지금 의창시의 동남쪽 양자강변 호정이란 곳에 전진 사
령부를 두고 육손과 대치했다.
그 사령부 터에는 호랑이 머리를 새기고 호정이라 쓴 석비가 서있
을 뿐이고 유비가 말을 타고 내렸다던 상마돈 하마대는 바위이름만이 이
고전장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육손이 거느린 오군사령부는 이 호정에서 남쪽으로 15㎞쯤 떨어진
지성에 있었다. 반격없이 대치하고만 있는 오군내부에서는 육손이 겁
쟁이라느니, 무능하다느니 반격없는데 대한 비난이 빗발쳤지만 육손은
대응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여름이 깊어 강변에 풀섶이 무성하고 삼협을 장악했던 수군은 적정
이 보이지않자 육상으로 철수하고 충천했던 투지도 기가 꺾였다. 육손이
노린 시기가 닥친 것이다. 짚단을 가득 실은 배로 40여개 진지에 대한
동시 기습으로 화공을 폈다. 소위 「화소연영칠백리」인 것이다.
유비는 삼협입구인 기문밖 봉절 영안궁으로 후퇴했다. 영안궁은 강
변인 백제성에 있었다하고 지금 봉절사범학교 구내에 있었다기도 한다.그
구내에는 「…여궁지」라는 비석이 서있는데 「영안궁지」가 마모된 것으로
해독되고 있다.
송나라때 소동파가 영안궁을 방문하고 시를 남겼는데 왜 이름처럼
길이 편안하지 못했던고 하고 배회하며 옛노인들에게 물으니 그저 영안
문이 있을 따름이라 했다.
이곳에서 영안하지 못했던 유비는 제갈량을 불러 아들 유선을 후사
로 맡기면서 받들다 부족하면대신 대권을 맡으라고 유언하고 죽었다.
한나라말에 이 지역에 독립국을 이루고있던 공손술이 황제의 등극
을 노리고 지은 백제성이요, 그를모신 백제묘인데 그 주인공을 몰아내고
유비를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협댐이 완성되면 이 백제성은 수위가 올라 정상부분만이 남은 백
제도가 될 참이다. <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