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민주주의의 원칙은 단 두 개의 명제로 요약된다. 하나는 "모든 사
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 명제들을 비틀고 왜곡 수정할 때 민주주의는 소극,
농담, 광대놀음으로 변질한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보
여준 것처럼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명제 위에 건설된 동물 공화국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로 그 명제를
왜곡하는 순간 공화국은 광대놀음과도 같은, 그러나 고통스럽기 짝이 없
는 전체주의 독재체제로 바뀐다. 변질한 체제 속에서 권력은 국민으로부
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더 구체적으로는 그의 '총')에게서 나
온다.

이 명제들을 바꾸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그 명제들을 바꾸어야 할 강
력한 욕망과 동기를 가진 자이다. 권력욕, 지배와 욕망, 복수심, 착취,
자기가 아니고서는 세상에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는 망상… 이런 것이
사람들의 꼭대기 위로 군림하려는 그의 욕망이고 동기이다. 그는 민주주
의의 명제들을 비틀기 위해 사람들을 겁주고 고문하고 탄압한다. 그가 성
공하는 순간민주주의는 소극으로 바뀌고 정치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뼈
를 분지르고 목을 비트는 가혹한 새디즘의 영역이 된다. 잘못된 정치가
광대놀음이면서 동시에 비극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치의 이같은 타
락, 민주주의의 이같은 소극화를 막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하
느님이 아니라 깨어 있는 국민이다. 깨어 있는 국민은 링컨이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잘 표현했듯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그래서 민주주의 명제에 '헌
신하기로' 약속한 공동체 구성원들이다. 그 헌신은 어떤 신을위한 봉납행
위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국민 자신의 권리, 이익, 행복을 제 손으로 지
키고 관리한다는 능력과 명예의 확인이며 그 확인의 부단한 행사이다. 그
러므로 정치 새디스트의 손을 중지시키고 독재를 막는 일은 국민의 자랑
아닌 의무이다.

이처럼 명백하고 간단한, 세살바기 어린 아이도 알아들을 민주주의 명
제들과 헌신의 요구가 단 한번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존중되지 않은 것
이 부끄럽게도 광복 이후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현실이었다. 우리
는 민주주의 원칙들에 헌신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갖지 못했고 우리 자신
이 그 원칙들을 지켜내는데 실패했다. 이 장엄한 실패담의 일차적 책임은
국민을 겁주고 두들겨 패면서 복종과 충성을 강요한 권력의 새디스트들에
게 있다. 가학자들이 독하게 총칼을 들이댈 때 움츠리고 겁먹지 않는 백
성은 없다. 독재자 한 사람은 한동안, 때로는 수십년에 걸쳐, 이 움츠린
국민을 경멸하면서 그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이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광
복이후 근 50년간 우리는 민주정치 아닌 광대놀음 비슷한 것의 주인공들
을 줄줄이 우리의 정치 지도자로 가지게 되었는데, 이 '가짐'은 강요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국민적 허용과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 때로는 도생
을 위해, 때로는 대권력의 '시혜자'가 던져주는 부스러기 권력, 떡고물,
빵조각을 얻기 위해, 그리고 대부분은 그냥 벌레처럼 낮은 자세로 엎드려
소리 없이 살기 위해 우리는 독재와 권위주의와 전체주의적 지배를 허용
하고 용인한 것이다. 독재는 국민의 이 피동적 허용과 용인 위에 번성한
다.

1996년 8월26일 월요일, 대한민국 법정에서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을 상
대로 진행된 선고 공판은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정치 질서 유린 행위에 가
해진 국민의 심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국민의 차원에서 이 공판은 한두
개인에 대한 '정치 보복'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50년 헌정사를 만신창
이로 만든 왜곡의 역사에 대한 심판이며 그 잘못 진행된 역사를 제 궤도
로 되돌리려는 의지의 가장 선명한 표현이다. 이번 공판의 이 중요한 첫
번째 의미를 인식하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두뇌 일부를
안락사시키고 시신경을 마비시켜서라도 특정의 사적 이해 관계를 지켜내
려는 강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1996년 8월26일 월요일, 대한민국 법정에서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을 상
대로 진행된 선고공판은 그러나 동시에 우리 국민 모두가 우리 자신에게
내리는 준엄한 심판이기도 하다. 그것은 파탄의 헌정사를 묵인하고 용인
한 피동성과 수동성에 대한 재판이며 민주주의 명제들을 지켜내지 못한
부끄러움에 대해서 그 부끄러움의 주인들이 스스로 가하는 괴로운 심판이
다.

이번 공판의 이 두번째 의미를 인식하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
람들은 두뇌를 몽땅 안락사시키고 시신경을 모두 마비시켜서라도 민주질
서 유린 행위에또 다시 동참하고 그것을 용인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
이다. 마틴 루터킹 목사 말대로 잘못된 것을 용인하고 불의를 허용하는
자는 불가피하게 그 불의의 공범자이다.

5백년, 1천년 후 심판은 심판이 아니다. 이 두 개의 의미, 그것이
1996년 8월26일 월요일에 진행된 이른바 '역사적 재판의 '역사적 의미'이
다. 역사의 정의는 어디 먼 곳에, 역사 바깥에 초시간적 진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 공동체 구성원들이 어떤 공동체, 어떤 질서,
어떤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서로 합의하고 선택한
원칙, 명제, 가치들이며 1945년 이후 더 정확히는 1948년 공화국 건립 이
후(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상해 임정이 공화국 헌법을 채택한 순간 이
후) 우리가 선택하거나 선택하기로 동의한 민주주의 원칙과 명제들이 우
리시대의 역사적 정의이고 그 정의의 기초이다.

그 정의가 부서지고 유린된 것이 '왜곡된 역사'이며, 그 비뚤어진 역사
를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모든 오류를 오류로 선고하는 것이 '역사적 재
판'이다. 한 오백년 후에, 또는 천년 후에 내려지는 심판은 이미 당대적
정의를 떠난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심판도 아무것도 아니다.

지난 50년간 우리가 작성해온 오류 목록은 아무리 줄여서 말해도 우리
의 수치이고 치욕이다. 헌정 질서 유린은 정치 차원 추문으로만 끝날 것
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정치적 가학자들에 의한 테러
리즘은 어느새 우리의 '심리적' 질병이 되고 '문화'의 일부가 되어 병든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인명 경시와 인간 희생을 '놀라울
것 없는' 현실이 되게 했고 허위와 거짓말의 문화를 심화시켰으며 독재자
를 예찬하고 추종하는 수동적 파시즘 문화-'왕초와 똘만이의 문화'를 배
양했다. 독재 권력은 돈과 권력의 결착에 따른 부패 문화를 조장함과 동
시에 우리 언어를 타락시키고 전통적 가치들(예컨대 '충의인효')을 돌이
킬수 없는 마피아적 오염권 속으로 추락시켰다. 역사적 안목으로 지난 반
세기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우리의 이 찬란한 오류 목록이 어떤 구실로도
방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자신의 오류와 실패를 깨끗하게 인정하는 국민이 위대한 국민이다. 그
런 인정만이 동일 오류 반복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떴을 때
온 독일 국민은 그에게 열광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패전 이후
독일 국민은 그 열광적 실수를 깨끗이 인정하고 그런 실수 재발을 방지할
것을 국민 결의로 채택했다. 우리가 일본을 향해 거듭 요구하는 것도 역
사적 과오 인정과 재발 방지 결의이다. 우리의 그 말발이 서게하기 위해
서는 우리 자신이 치열한 자기 성찰과 반성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된
다. 일부 인사들은 이번 역사적 재판을 놓고 누가 누구에게 돌팔매질이라
는 논리로 그 의미를 희석하려 든다. 그러나 그 팔매질의 가치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우리자신에 대한 팔매질이라는 데 있다. 이 당당한 자세는 이
번 공판에 대한 모든 종류의 냉소주의가 왜 부당한 것인가를 알게 한다.
민주주의는 결국 자유와 행복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고
씨는 행복을 위해 자유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통치 원리로 채택했던 비
극적 인물이며 그 이후 군사정권들은 그게 안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혹
은역사 의식 결핍과 복수심과 도생의 명령과 권력욕 때문에 그 비극을 부
당하게 연장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누군가의 말대로 첫번째 것이 비극이
라면 그 이후 두번째 세번째 것은 그래서 소극이다.

이른바 '오류의 역사청산'은 이번 이번 재판을 끝으로 종식될 수 있을
까? 청산의 청산은 가능할까? 원칙상 '마지막 청산'이나 '마지막 재판'이
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것이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는
결의와 희망을 가져야 한다. 오류 반복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 반
복을 막을 수 있다는 것. 막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시민사회의
믿음이고 의무이다. 이것이 이번 공판의세번째 의미이자 교훈이며 명령이
다. <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