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신발의 주인공을 찾아라!」.
8월 초 전남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고분군(전남도 지정 기념물 제
136호) 중 제3호분(6세기 초 추정)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에 고고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금동신발이 출토된 만큼 그에 걸맞는 금동관이
나 금동허리띠가 출토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큰데다, 과연 이 금
동신발의 주인공은 이 지역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던 사람일까 하는 의
문 때문이다. 그간의 발굴 결과를 보면 금동신발이나 금동관은 왕이나
수장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복암리고분에 묻힌 사람은 왕이
나 수장이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 현재로서는 명확한 답을 내리기 힘
들다.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마한은 서기 369년 백제 근초고왕에게 멸망
당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5세기까지는 마한이 정치-문화
적인 독자성을 어느 정도는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예를 들어, 마
한의 고유한 무덤 양식인 옹관묘(독 안에 사람을 매장하는 방식)가 서
기후 5세기로 추정되는 전라도의 여러 고분에서 발견됐다. 무덤 양식
이 그사회의 철학과 종교관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면,마한의 독자성은 그만큼 오래 지속됐다고 추론할 수 있다.
복암리고분은 돌을 쌓아 무덤 안에 공간을 만든 뒤(석실), 옹관 4
기를 석실 안에 넣고 석실 위로 흙을 덮은 무덤이다. 학계는 이를통해
복암리고분을 쌓은 사람들은 마한의 잔존세력이거나 그 후예로서 백제
의 영향을 받아 점차 독자성을 상실해가는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하
고 있다. 석실묘는 분명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옹관을 넣음으
로써 여전히 마한의 전통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특히 금동신발이 나온 만큼, 이 고분에 묻힌 사람은 왕은 아니었더
라도 분명 독자적인 정치력을 가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고분에서 금
동신발이 출토되면 통상 금관도 발견되는 게 상례. 복암리고분을 포함,
지금까지 백제 땅에서 금동신발이 나온 곳은 모두 4군데. 이중 복암리
고분만 제외하고는 예외없이 금동관이 나왔다.
지난 1918년 일본인 곡정제일이 발굴한 전남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9호분(서기 5세기 후반 추정)에서 금동신발과 금동관이 출토됐다. 전
북 익산군 입점리(5세기말∼6세기초 추정)에서도, 충남 공주 무녕왕릉
(6세기 중반)에서도 금동신발과 금동관이 나왔다.
나주에서만 두차례 금동신발이 나왔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최
몽룡 교수(고고학)는 반남면 고분군 발굴보고서(1988년)에 발표
한 논문에서 나주지역을 마한의 근거지였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복암
리 고분에서 다시금 금동신발이 나옴으로써 이 주장은 더욱 힘을 얻게
됐다.
복암리고분은 현재 국립문화재 연구소와 박물관이 공동발굴
중이다. 금동신발 외에도 은으로 된 실로 손잡이를 감싼 길이 1.5m짜
리 둥근 손잡이 큰 칼과 뚜껑있는 잔(개배), 가운데 구멍을 뚫어 실에
꿰서 목걸이 등으로 쓰는 지름 0.3∼0.5㎝짜리 감색과 옅은 하늘색의
유리구슬 수십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