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만병력으로 검문관서 10만 위군 막아 ###.
중국땅을 십자가름으로 사등분한다면 그 왼편 아랫부분이 유비 제갈
량이 다스린 촉나라요, 지금의 사천성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온통
험준한 산에 둘러싸여 주발속에라도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밖으로 틔
었다면 오로지 육로 한곳과 수로 한곳 두곳 뿐이다. 수로는 동쪽으로 난
양자강 삼협이요, 육로는 북으로 난 검문이다. 하느님이 도끼로라도 다
듬어 놓은 듯한 칼날같은 72봉우리의 60리 연맥이 검문산이다. 그 복판
즈음이 잘룩하게 꺼져 마치 문처럼 열려있어 검문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
다. 자연대로의 그 고갯길 폭이 20m요, 길이는 5백m쯤 되어 보였다. 이
고개를 넘어갔던 이백이 「올려보니 하늘에 한줄 금이 가 있다」고 읊어
심산유곡을 뜻하는 「일선천」이란 말을 만들어낸 현장이요, 이 고개를 넘
어왔던 두보가 성난 장부하나 백만을 막는다고 읊었던 현장이다.
시에는 보이는 물상을 읊어서 발휘되는 외채가 있고, 보이지않는 심
상을 읊어 발휘되는 내윤이 있다. 두보가 이 검문관을 넘는 전후 5백리
길에서 12수의 시를 읊었는데 그 많은 천하의 기관을 접했으면서 반짝하
는 외채를 느낄수가 없다. 길이 험하다는 것, 굶주림과 고닯음, 그리고
가엾은 처자에의 연민과 늙어 기력이 쇠잔함이 두드러질 뿐이다.
그가 이 검문관을 넘기 전 동곡에 있었을 때는 먹을 것 없어 원숭이나
먹는 도토리 주우러 겨울산에 가 「손발이 얼고 피육이 죽어있는데/ 아
비풍이나를 위해 하늘에서 내리는구나」고 읊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검문관을 넘을 때 지은 「공낭(빈 주머니)」에 보면 돈 한푼 호주머니속에
서 굴리며 망서린다는 대목이 있다. 아마도 이 고갯길에 있었을 이곳 명
물인 검문두부장수 앞을 지나면서 읊었을 빈 주머니일 것이다. 그런 심
경에서 검문의 기관을 읊었다 해서 외채가 날 리가 없었음직하다. 오로
지 빈곤에서 절박한 내윤을 절감할 따름이다.
일당 백만의 험한 관문이기에 많은 역사도 다채롭다. 유비 조조 손권
이 천하삼분지계로 세운 삼국이 무너지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 검문관이
다. 제갈량이 그 유명한 출사표를 올리고 위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에 나
섰을 때 위나라의 지장인 강유가 투항을 했다. 제갈량이 죽을때 자신의
저작 24편과 당시의 비밀무기인 연발식 활인 연노의 설계도를 강유에게
맡겼을 만큼 신임이 대단했으며,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어 위나라에 대한
북벌을 되풀이해온 터였다. 그 강유가 진서대장군으로서 1만병력을 거느
리고 검문관을 지키고 있는데 위나라에서 주장 등애 부장 종회로 하여금
10만 대군으로 촉나라를 치고자 이 검문관에서 대결하였다.
등예의 대군은 석달동안 버티다 병량이 떨어지자 일부 병력을 빼어
병가에서는 상상치도 못할 감숙성의 준령을 넘어 우회하여 등을 치는 작
전을 구사했다. 사람이 다닌 적이 없는 7백리를 모포로 몸을 싸아 비탈
을구르고 손과 발을 잡아 사람으로 끈을 만들어 벼랑을 타내리며 작전을
수행했다. 촉나라 황제 유선은 등예앞에 무릎을 꿇었고, 종회와 검문관
에서 대결하고 있던 강유도 유선의 칙명을 받고 투항했다. 강유가 투항
한 것은 고육지책이라고 「삼국지연의」는 적고 있다.
그에 의하면 종회로 하여금 촉의 서울을 점거하고 있는 등예를 처치
케하여 촉나라 황제로 받들어 놓고 종회를 처치, 촉을 부활시킨다는 것
이 그것이다. 종회는 강유의 계책에 말려들어 등예를 잡아들인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위나라의 기무업무를 보는 감군이 이 음모를 알고 종회를 잡
아죽였고, 강유는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강유
를 국가의 부흥을 노린 충신으로 다루었으나 진수의 「삼국지」에는 싸우
지도 않고 투항해버린 불충으로 적고 있어 어느 편이 옳은지 알 길이없
다.
검문관에는 투항하라는 칙명을 받고 강유의 장병들이 칼로 바위를 치
며 통곡했다는 그 자국난 도흔석은 남아있는데, 강유가 지휘를 했다는
장대며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는 강유의 상은 도로를 확장할 때 없애버렸
다 한다. 검문관 비탈을 내리면 두부집 50여개가 즐비한 검각이 나오고,
그 검각의 두부집들 사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밭 가운데 초라하게 강유의
무덤이 있다. 호석을 두른 채 쑥대가 무성했으며, 비석에는 「촉대장군
강유지묘」라 새겨져 있었는데 글씨가 훼손돼 있었다.
장군 비명을 긁어 가루내어 먹으면 장군같은 아들을 낳는다는 속신
때문이라니 우리나라의 남아선호 속신과 다를 게 없다.
검각에서 명물인 박달지팡이를 사서 짚고 재하나를 넘으면 이미 삼
국지시대의 구길인 취운랑이 나온다. 고서에 보면 아름드리 고백목이
3백여리에 10만그루가 박석길 양편에 자라고 있었다던데 지금은 8천그루
쯤 남았으며, 그중 가장 오래된 나무가 지름 2m 높이 27m 수령 2천3백년
의 1007호 나무로 밑둥에 사람 둘이 들어가 앉을 만한 구멍이 나있었다.
아두백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촉나라 황제 아두(유선의 아명)가 위
나라에 투항한 다음 낙양으로 끌려가는데 이 길을 가다가 비가 쏟아져
그 속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해서 아두백인 것이다.
장비가 심었다는 장비백도 있고, 문화혁명때 반혁명의 상징적 인물인
남패천백도 있었다. 모든 나무가 왼쪽으로 기우는 좌경인데 유독 이나무
만이 우경이라서 근간에 붙인 이름이라한다. 각기 다른 나뭇가지가 붙어
한나무를 이룬 원앙목도 있는데 신혼부부가 찾는 성지목이 돼있다 했다.
<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