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숱한 인생역정 딛고 「트로트의 황제」가 되기까지 ###.
지난해 댄스와 발라드의 모진 공세에도 불구하고 범국민적으로 히트
한 트로트곡이 하나 있다. 「뽕짜작 봉짝」이라는 닳고 닳은 리듬의 기존
트로트곡과는 달리 라틴풍의 웅장한 인트로로 시작하는 「찬찬찬」이란 곡
이다. 이 「찬찬찬」의 작곡가 이호섭씨(37)는 트로트계에서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작곡가다. 물론 현역 최연소 트로트가요 작곡가. 이곡 하나로 무
명에서 일약 슈퍼스타로 발돋움한 의 신화를 꿈꾸며 곡 하나 받기
를 전국의 신인가수들이 갈망하는 귀하신 몸이다. 또 라디오 프로그램
7개, TV 프로그램 5개 등 총 12개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현하는 바쁘
신몸이기도 하다. 그가 작사나 작곡을 한 곡들을 모아 보면 그 자체가
한국 성인가요의 지형도를 형성한다. 주현미의 「잠깐만」 「짝사랑」, 설운
도의 「원점」 「다함께 차차차」, 현철의 「싫다 싫어」, 김혜연의 「바보 같
은 여자」 등등. 잘만들어진 트로트곡일수록 「사연 많은 인생사」를 효과
적으로 압축한 경우가 많다. 이들 노래를 듣다보면 『극적인 이들 곡을
만든 주인공 역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라는 궁금증이 자연
스레 든다.
/// 연좌제로 꺾인 법학도의 꿈 ///.
『다른 대중가요도 마찬가지겠지만 트로트곡들은 3분 드라마입니다. 3
분내에 드라마 한 편이 전달 안되면 팬들이 귀를 기울여 줄 아무런 이유
가없죠. 작사를 예로 들 경우 생략, 점층, 반복, 강조 등 고난도 문예기
법들이 총동원되는 어려운 기술입니다. 대중들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
그런 곡을 만드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소설 같은 인생을 살았기에 대
중들의 바람과정서를 저의 노래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우선 경력부터 이채롭다. 전공은 음악과는 전혀 무관한 법대 출
신이다. 또 학창 시절에는 내로라하는 데모꾼으로 수배 리스트에 오르기
도했다. 또 작곡가라면 으쓱 그럴 것이라고 여겨지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심사위원석에 앉아서 『박자가 어떻고 음정이 어떠니』하면서 폼을
잡는 일체의 권위주의를 배격한다. 일단 방송에 출연한 이상 그는 개그
맨이되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특유의 익살과 아나운서를 지망하며 갈고
닦았던 화술로 시청자와 청취자들을 울렸다 웃겼다 한다. 아예 자신을
「개그 작곡밥」이라고 소개할 정도다. 물론 개그와 작곡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스스로를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경남 의령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판사, 판사」하며 판사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물론 어머니의 뜻대로 법대()를 진학했지
만 그는 판사(judge)보다 판사(buy the record)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
러나 효자였던 그는 1년6개월 동안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는 등 법관이
되기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했다. 그가 법관의 길을 포기하고 연예계로
발을 헛디딘(?) 결정적 동기는 끼가 아닌 사회적 질곡 탓이었다. 79년
21회 사법고시를 며칠 앞두고 그의 숙부는 『너의 아버지는 6.25 때 부
역자로 몰려 대구교도소에서 수감됐었고 그 홧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병사했다』며 『너는 연좌제에 묶여 사법시험에 붙어도 판사가 될 수 없으
니다 하늘 뜻으로 알라』는 말을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인생에 큰 변
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특히 어린시절 살았던 마산 용마산 공원 기슭의
판잣집이 대통령의 『보기 흉하다』는 한 마디로 철거되는 것을 목
격한 터라 박정권에 대한 적개심이 끝없이 불타올랐다고 한다. 그는 부
마항쟁시 데모대의 선봉에 섰다. 그에게는 세상 자체가 적이었다. 결국
공안사범으로 쫓기는 몸이 되고 경찰을 피해 상경을 결심한다. 서울로
올라온 그가 처음 시작했던 것은 김밥장사였다.
시작하는 날 그는 단 한 개의 김밥도 못팔았다. 「김밥」까지는 나오는
데 「사세요」까지는 차마 나올 수가 없었다는 것. 결국 첫사업에 쓰디쓴
실패를 맛본 그에게 유흥가 웨이터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마포의 「걸작
스탠드바」가 그가 80년대 초반 몸담았던 직장이었다. 어깨 너머로 쇼를
구경하며 「나도 언젠가는 무대에 서야할 텐데」라는 꿈을 키워나갔던 그
에게 마침내 기회는 왔다. 출연자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그가 대신 무대
에 올라 선 것. 그는 평소 관심 많았던 명아나운서 흉내로 좌중을 폭소
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고 한다. 그날부터 그는 스탠드바 사회자로 지
위가 격상됐다.
/// 86년 의 「8도 사투리 디스코」로 가요계 데뷔 ///.
이제 허기를 면하게 됐다고 판단한 순간 그는 틈틈히 쓴 곡을 들고
레코드사를 찾는다. 물론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그러다 85년 안타프로
덕션의 사장이었던 작곡가 안치행씨가 색깔 있는 여고생 가수가 하나 있
는데 마땅한 곡이 없다며 그에게 아이템을 하나 생각해 보라고 제의했다.
그 가수가 바로 훗날 「성은 김이요」로 트로트의 신데렐라로 등극하는 문
희옥이었다. 그는 첫작품에서 대박을 기록하고 만다. 안 사장이 『너는
왜 목요일을 몽요일로 발음하냐』며 『이제 사투리를 고치라』고 말한 데서
힌트를 얻었던 「8도사투리 디스코」였다. 『사투리별로 소절을 달리 부르
면 히트하지 않고 배기랴』는 판단에서 그는 「한국 방언 대사전」을 밤새
워독파한 끝에 「8도 사투리 디스코」를 만들어 냈다. 결과는 최단시일 만
에 1백만 장 돌파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의 히트곡에는 유난히 사연이 많다. 의 「원점」은 84년도에
취입됐지만 히트는 88년도에 됐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88년도 「전국
노래자랑」의 연말결선에서 대상을 받은 혼혈가수 오세근이 이 노래를 불
렀고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딸과 혼혈아라는 이유로 직장을 얻지 못하
고 품팔이를 해야 하는 그 애절한 사연에 국민적인 감동극이 연출됐었다.
90년대 초반 이후 그는 잠시 슬럼프를 맞는다. 일체의 창작 행위를
그만둔 것. 왜 대중가요 창법은 이론적으로 정립이 안돼 있느냐는 문제
인식을 갖고 그는 본격적인 저술작업에 들어갔다. 그 노력은 94년 「대중
가요 가창학」이라는 제목으로 결실을 맺었으나 노래처럼 뜨지는 못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다시 미소지었다. 「찬찬찬」이 곧바로 터져주었기
때문이다. 원래이 곡은 태진아에게 갈 곡이었는데 『이왕이면 신인에게
곡을 주어서 히트하면 더 보람 있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에 무명이
었던 에게 곡을주었다고 한다. 물론 이 노래는 남성적인 보이스의
굵은 톤인 이 여성적인 가는 목소리의 태진아보다 적격이었음을
그도 부인하지 않았다.
마치 댄스음악에서 김창환이 이룬 것처럼 트로트계에서 그 비슷한 신
화를 창조한 이호섭씨. 트로트의 앞날은 그의 감각과 재능에 달려 있다
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물론 트로트는 위기입니다. 그러나 좋은 씨가 없어서 밭이 가꾸어
지지않았던 거지, 음악 자체가 사양길로 접어든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언제부터 랩만 있었습니까? 젊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가사와 리듬
만담아낼 수 있다면 어느 누가 트로트의 구성진 멜로디를 외면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