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에 내정된 김수한의원은 70, 80년대 야
당가에서 주로 활약하고, 성장했던 6선의 정치인이다. 90년 3당 합당
이후 총재를 따라 여당에 편입했다. 그러나 13-14대 연속 낙선,
8년의 긴 정치공백을 거친 뒤 김대통령의 배려로 이번에 전국구로 원
내에 진출, 입법부 수장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그만큼 김대통령
과는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64년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 대변인을 거쳐, 66년
윤보선씨가 이끌던 신한당 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7대때
신민당 전국구로 원내진출, 10대까지 내리 서울 관악에서 당선됐다.
78년 10대때 전국 최다득표(22만여표)로 원내진출, 진산계보에 편입,
원내총무이던 김대통령과 정치적 인연이 시작됐다. 또 그는 70, 80년
대 야당가의 라이벌인 -, 양김이 중요한 정치적 승부를
할때마다 YS진영에 섰다. 멀게는 70년 두 「40대 기수」가 맞붙은 신민
당 대통령후보 경선때, 짧게는 86년 YS-DJ가 직선제 개헌투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개헌투쟁 이후에는 상도동사단에 들어왔다.

특히 70년대 신도환--씨가 연합, 당권을 잡았을때 그
는 당권을 빼앗긴 김대통령과 「야당성회복투쟁위」를 만들어 당권투쟁
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90년도 YS가 소련을 방문할
때 대표단에 원외인 그를 포함시키는 문제로 대통령과 「갈등」
을 빚을 정도로 그를 챙긴다. 이번에 국회의장에 발탁된 배경이기도
하다.

야당사상 10년이라는 최장대변인 기록을 갖고 있으며, 9대때 국회
의사당 테니스장을 만들 정도로 테니스에 일가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당권이나 권력의 대세가 이동할 때마다 「신권력세력」 쪽에
줄을 서 『그가 있는 곳에 권력이 있다』는 비평을 받기도 했다.

80년대 신군부의 등장때는 정치피규제에 묶여 출마가 금지됐으며,
13-14대때는 관악에서 의원에 연속 고배를 마신뒤 한-일친선협
회장으로 일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