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보다 민족개화에 헌신할 각오" 1985년 귀국길 ###.

1894년 6월 결혼에서 1895년 귀국때까지 서재필은 비록 경제적으
로 넉넉지는 못했지만 신부 뮤리엘 암스트롱과 단란한 신혼생활을 보
냈다. 반면 이 1년반 동안 고국에서는 자고새면 정국의 주도권이 이
나라 저 나라로 바뀌는 혼란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외관상으로는 서재필은 이 기간동안 의사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개인생활에 충실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신문을 비롯한 여러 루트
를 통해 고국의 정세에 관심을 기울였다. 20세 청년의 나이로 갑신정
변에 참가했던 사람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984년은 여러 모로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새해 벽두부터 동학
혁명이 일어났고, 2월에는 김옥균이 조선정부가 보낸 자객에 의해 중
국 상해에서 암살됐다. 그리고 서재필이 결혼하고 한달여가 지난 8월
1일 발발한 청일전쟁을 계기로 은 조선에서의 패권을 확립한다.

청일전쟁에 관한 서재필의 생각은 이랬다. 「청일전쟁 발발소식이
서재필에게는 결코 놀랄 일은 아니었다. 왜냐 하면 그에게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날 것이냐가 문제였기 때
문이었다. 또한 군의 대승리에 대해서도 서재필은 예상했었기 때
문에 놀랄 것이 없었다. 다만 그가 걱정했던 것은 어느 편이 승리하
든간에 조선은 패망국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한때 그가 조선의
개화를 위해 에 의존한 일이 있기는 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
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 수단이었다.」 (임창영지음 「서재필박사전
기」에서).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대한 사실이 있다. 흔히 말하
는 `서재필은 친일적 인물'이라는 주장이다. 의 지원을 얻어 조
선을 근대화하려 했던 갑신정변 참여가 그렇고, 「독립신문」에서도 여
러 차례에 걸쳐 에 대해 호의적인 논설을 썼으며, 서재필이 주도
한 독립협회 회원중에 이후 친일파들이 많이 생겼다는 등이 근거이다.

아마도 인적 유대에 의한 명확한 친일성여부를 따진다면 `갑신정
변'이 여러 가지 정황에서 보더라도 혐의가 높을 것이다. 그러나 갑
신정변은 의 명확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하기 위
한 쿠데타는 아니었다. 또한 갑신정변 실패이후 서재필은 의 2중
적 속성을 이미 간파한 뒤였다.

우리 학계, 특히 역사학계에서는 근대화론을 일방적으로 친일 노
선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친일노선이 자신들을 근대화노선으
로 정당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근대화론=친일노선이란 등식이 성립하
는 것은 아니다.

이 시점에서 서재필은 미국사회에서 10년동안 생활한 인물이다.아
무리 이 조선에 비해 많이 근대화되었다고 하더라도,미국과는 모
든 면에서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재필은 근대화의 모델로 이 아
니라 미국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근대화론을 무조건 친일론으로 몰아세우려는 학계의 일
부 주장은 오히려 당시 조선의 수구세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근대화론
자체를 배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청일전쟁은 조선 조정에 친일 세력의 득세를
가져왔고, 이는 `갑오경쟁'으로 구체화된다.

「갑오개혁이라 하면 넓은 의미로는 1894년7월 군국기무처의 활동
이후 1896년2월 아관파천으로 개혁파가 제거될 때까지 진행되었던 일
련의 개혁운동을 지칭한다. 개혁기간중 다음과 같은 여섯차례의 내각
개편이 있었다. 1기(1894.7.27∼12.12)의 이른바 김홍집- 내각,
2기(1894.12.17∼1895.5.21)의 김홍집-박영효 내각, 3기(1895.5.21∼
7.6)의 박정양-박영효내각, 4기(1895.7.6∼8.23)의 박정양-유길준 내
각, 5기(1895.8.23∼10.8)의 김홍집-박정양 내각, 6기(1895.10.8∼
1896.2.11)의 김홍집-유길준내각 등이 그것이다.」 (한길사판 「한국사
11권).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박영효'라는 이름이다. 1894년12월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에 대한 반역죄는 사면
되었다. 이에 따라 에 머물던 박영효와 미국에 있던 서광범은 서
둘러 귀국했다. 당연히 서재필에게도 귀국권유가 있었다.

앞서 말한 서재필의 친일성 문제와 관련해서 이 부문은 중요하
다. 서재필에게 귀국을 권유한 사람은 재 공사였다.시기
는 1895년 봄쯤으로 보인다. 청일전쟁에서 자신감을 갖게 된 정
부는 스스로 `친일인사'로 간주한 갑신정변관련 망명자들을 조선으로
불러들이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이나 미국등지에 있던 다수의
개화파 인사들이 귀국을 서둘렀다.

측은 서재필에게 「처음에는 외무참판직을, 나중에는 외부대
신직을 받으라고 제의했으나, 그는 모두 사양해버렸다.」(임창영.앞의
책에서). 결국 공사는 본국에 "미국인과 결혼하고 의사개업을 하
고 있는 서재필박사를 조선으로 귀국하도록 설득하는 일은 도저히 불
가능하다"는 전문을 보내고 귀국종용을 포기한다.

서재필이 이같은 측 권유를 거부한 데는 갑신정변 직후 당한
으로부터의 배신감 또한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결국 서재필은 고국에 개화파가 주축이 된 친일내각이 성립돼 개
혁을 추진하다가 1895년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개화파가 탄압을 받게 되자, 다시 박영효가 미국으로 망
명하게 되기까지 어쩌면 서재필로서는 정치적으로 `호기'일수도 있었
던 시기에 귀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략 1895년 가을 무
렵 박영효가 미국으로 서재필을 찾아왔다. 박영효는 그간에 있었던
자신의 일과 고국소식을 상세하게 알려줬다. 정부의 설득으로 귀
국해 내무대신직 등을 역임하며 애를 썼으나 명성황후와 양편으
로부터 견제를 받아 쫓겨났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은 세력기반이
없어 조선동포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어려우니 서재필 당신이 좀 나서
달라고 말했다.

당시 두사람의 생각에 대해서는 이우진교수( 정치학)의 분
석이 매우 설득력 있다. 「박영효가 개인적으로 서재필이 귀국하여 정
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면 자신의 귀국과 정치적 재기가 쉬울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반면 서재필이 귀국하려
고 결심한 주된 이유는, 한동안 잊었던, 그의 말대로 `조국에대한 열
병'(Korean fever)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즉 그가 갑신정변때 가졌던
`개화를 통한 애국'과 해리 힐맨학교에 다니면서 꿈꾸었던 `국민계도'
의 꿈이 되살아나 탄탄대로였던 의사로서의 생활터전까지 버리게 만
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잊어서는 안되는 점이 있다. 이때 서재필은 이미
직접적 정치참여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민계몽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직접적 참여에 관심이 더 많았다면
에 의한 귀국 권유에 쉽게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반대로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해진 상황에서 귀국을 결심하지 않았을 것
이다.

서재필은 귀국을 결심한다. 당시의 심정을 그는 자서전에서 "즉
각적으로 민족을 위하여 큰 일을 하여 볼 좋은 기회가 닥쳐왔다고 깨
달았다.…마음 깊이 그리던 자유와 독립의 이상을 실천할 천재일우의
시기가 돌아온 것"(김도태편 「서재필박사 자서전」)이라고 밝히고 있
다.

문제는 신부 뮤리엘이었다.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과연 모든것
이 불편하고 낙후된 자신의 고국으로 함께 가줄 것인가 하는 것이 가
장 큰 문제였다. 게다가 예상치 못한 각종 위험들까지 도사리고 있는
판이었다. 서재필이 귀국의사를 밝히자, 뮤리엘은 "나는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하늘이 내리신 인간임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자랑스
럽게 여겨왔다"면서 "당신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무감으로 여
긴다면 나도 운명이 당신을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따라가겠
다"고 말했다.(임창영.앞의책에서).

두 사람은 1895년11월7일 여권을 신청해 다음날 지급받았다. 두
사람의 여권신청서는 재미학자 방선주박사의 노력에 의해 발굴된 바
있다. 당시에는 증명사진이 일반화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상에관해
서술형으로 적어놓았다.

「여권신청서에 의하면 그의 키는 5피트10인치(173cm)로서 퍽 큰키
였다. 이마는 넓고 높다고 하였으며, 코는 매부리코이며 얼굴은 둥글
다고 했다. 부인인 뮤리엘여사는 태생으로 여권신청서에는 18
76년생으로 되어 있으나 결혼증서에는 23세로 적혀있으므로 1871년생
이었을 것인데, 키가 여자로서는 후리후리한 5피트8인치(167.7cm)로
서 자기자신의 묘사에 의하면 이마는 좁으며 눈빛은 회색이고 코는
중코이며 머리카락은 갈색이고 얼굴은 둥글다고 했다.」 (이정식 지음
「서재필」.정음사간).

이렇게 해서 두사람은 병원일을 정리하고 12월초순 조선을 향해
떠난다. 서재필이 나이 33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