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서재필은 경력과 정치사상면에서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
다. 둘 다 미국을 모범국가로 생각했고 미국에서 공부를 했으며 미국
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은 언제나 미국에 대한 관찰
자였고 서재필은 미국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 단적인 예가
은 미국에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고 미국시민으로서 생활해본 적도
없지만 서재필은 정반대였다.
물론 거기에는 서재필의 귀화가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리
고 사고방식도 달랐다. 은 조국에서의 활동을 위한 준비 단계로
미국생활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서재필은 미국 속에서 자리잡겠다는 생
각과 조국을 위해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언제나 상충하며 공존했
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의 인생행로는 골격면에서는 대단히 유사하면서
도 결국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892년 조지 워싱턴대학의 전신인 콜럼비안대학 의학부를마친 서
재필은 군의참모부에서 번역담당 사서로 계속 일하는 한편 1년
동안 가필드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끝냈다. 아마도 새로운 학문을 배
우는 즐거움이 없었다면 서재필은 견디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는 대
학 졸업 당시의 심정을 과거 비서였던 임창영에게 "(당시) 나를 격려
할만한 헝겊 조각 하나도 없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수련의를 마칠 무렵, 즉 1893년 여름경 서재필은 군의참모
부 의학연구소로 배치됐다. 도서관일도 계속했다. 여기서 서재필은 의
학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그를 적극 후원해준 월터 리드 박사를 만난
다. 월터 리드박사에 대해서는 재미의사 현봉학씨가 상세히 알고 있다.
"존스 홉킨스의과대학 창설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빌링스박사가 세
계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윌리엄 웰치, 윌리엄 오슬러, 윌리엄 홀스테
두, 하워드 켈리 등을 초대해서 미국 최고의 의과대학을 에
창설하자 많은 우수한 학자들이 그곳으로 모이게 됐는데 이 그룹 중의
한 사람이 월터 리드 군의관대위였다." (현종민편 「서재필과 한국민주
주의」, 대한교과서간에서).
서재필과 리드의 관계에 대해 현씨는 또 이렇게 증언한다. "서재
필은 군의참모부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리드박사가 소장으로 있는 의학
연구소에서 조수로도 일할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서 병리학과 세균학의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빌링스박사와 군의참모부장 스턴
버그박사의 특별한 배려로 이루어진 학구생활을 위한 좋은 기회였다.".
여기서 그는 주로 당시로서는 의학 중에서도 신생분야였던 세균학
과 병리학을 익힌다. 그리고 그는 당시 미국내에서 이분야의 최고권위
자로 꼽히던 존스 홉킨스대학 윌리엄 웰치 박사의 강의를 듣기 위해 6
개월동안 주말마다 에 갔다. 리드박사의 소개에 의한 것임은
물론이다. 현씨는 "만일 그가 개업을 하지 않고 리드박사와의 학구생
활을 계속했더라면 황열병 연구원의 일원으로 역사적인 업적을 남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의학자로서의 서재필의 높은 자질을 평가한다.
그러나 1894년 그는 모교 교수였던 존슨박사의 권유로 공무원직을
사직하고 개업을 한다. "존슨박사의 권유는 국가공무원이 진급 기회가
극히 제한을 받고 있으니 차라리 개업을 하라는 것이었다."(임창영 지
음 「서재필박사전기」에서). 능력에 비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제약을
받아야 하는 서재필의 처지를 생각한 권유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서재필은 드디어 워싱턴시내에 사무실을 얻어 병리전
문병원을 개업했다. 그의 병원이 얼마나 잘 운영됐는지에 대해서는 의
견이 엇갈린다. 비서였던 임창영은 "당뇨치료에 관해 명성이 있었기때
문에 다른 도시에서도 찾아왔다"고 할 정도로 잘됐다고 말한다. 그러
나 한흥수교수( 정치학)는 윤치호의 견해를 빌려 "유색인종이었
기 때문에 차별을 받아 경제적 곤란에 봉착했고 그것이 귀국결심을 재
촉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이와 관련된 본인의 진술이없어 어느쪽이 사실에 가까운지를 분명
히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전체적으로 볼때 병원이 썩 잘된 것은 아닌
듯하며 또 그렇다고 귀국결심을 할만큼 사정이 어려웠던 것으로도 보
이지 않는다. 그리고 병원사정을 떠나 미국에서 의사자격을 취득한 서
재필 개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선은 분명 존경의 그것이었을 것이다.
서재필에대한 그같은 미국인들의 호기심을 넘어선 존경심이야말로
그가 당시 미국 명문가의 딸과 결혼할 수 있었던 사실을 제대로 설명
하도록 해주는 결정적 요인다. 서재필은 워싱턴에서 개업하던 시절 한
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호텔에는 제임스 화이트
부부와 부인의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뮤리엘 암스트롱양이 머물
고 있었다. 암스트롱의 친아버지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1822-1871)은
남북전쟁 당시 미국 최초로 철도우편사업을 창안한 군인이자 사업가였
다.
호텔에서 두 사람은 자주 마주쳤고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사랑이
싹텄다. 묘하게도 재혼의 외국인 상태를 은 의 호텔식당
에서 만났고 서재필은 워싱턴의 호텔에서 우연히 만났다.
서재필은 임창영에게 당시 암스트롱에 대한 인상을 "예술과 세계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매력있고 민감한 소녀"라고 표현했
다. 이 말이 정확하다면 두 사람의 공통된 관심사는 예술쪽보다는 세
계문화에서 찾아졌을 것이다. 우선 서재필이 예술에 대한 특별한 조예
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다가 세계문화야말로 두 사람이 자연
스럽게 나눌 수 있었던 공동의 주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암스트롱이 인종이나 문화의 차이를 넘어 서재필에 대해
흥미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보다 구체적인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서는 서재필의 비서였던 임창영의 전기가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하고있
다.
「비록 서재필이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겸손하고 말이 별로 없었으
나 그가 하는 행동으로 미루어 그는 자기 고국의 무거운 짐을 그의 양
어깨에 걸머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냈다. 또한 그는 때때로 몇
가지 미국식 방식에 대해 비평적이면서도 미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었던 근본 원인들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 그는 그 비결을 조선에 더 유익한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꼭 그 비결을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흔히 말하기도 했다」.
쉽게 말하면 미국인들에게서는 느끼기 힘든 지사적 풍모가 미국 처
녀 암스트롱을 사로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또한 프란체스카가 이
승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과 흡사하다.
서재필도 마찬가지였다. 편견을 갖고 대하기 쉬운 동양이 힘없는
나라 출신인 자신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해주는 미국인 처녀가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서재필은 그녀를 알게 되면 될수록 그녀와 더
같이 있고 싶어졌다. 암스트롱양은 박식했고 표현력이 솔직한 편이었
으면서도 매우 예모가 밝았다.」 (임창영의 전기).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들었고 결국 1894년 6월20일 워싱턴의 카비
넌트교회에서 많은 하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서재필
은 이때 미국에 온지 거의 10년만에 맛보는 행복감을 만끽했을 것이다.
정변참여, 망명, 가족몰살, 미국망명, 하급노동자시절,고교시
절, 대학시절 등등에서 겪어야 했던 온갖 어려움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가났을 것이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던 미국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서재필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
다.
현봉학씨에 따르면 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워싱턴 포스트지에서는
「신랑 서재필의 학자로서의 명성은 워싱턴에서만 알려진 것이 아니라」
로 시작하는 기사를 내보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을 구가하기에 서재필의 운명은 너무나 조국의
현실과 얽혀 있었다. `고국에 대한 열정' 또한 미국체류 10년동안 한
번도 식지 않았다. 다만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는 기회만을 살피고 있
었다. 특히 그가 결혼한 1894년은 조국에서 동학혁명과 갑오경장등 근
대사회를 향한 대격변이 일어난 해였다. 그의 귀국은 시간문제였는지
모른다.
30세 청년 서재필. 그는 미국생활 10년을 통해 선진민주사회응 어
떤 것인가를 그 내부에서 속속들이 배웠다. 「그는 미국국민들이 자유
스러운 분위기에서 서로 도우며 융화를 이루고 살고 있고 국민이 정부
를 지지하며 정부가 국민을 억압하지 않을 뿐더러 국민에게 모든 편의
를 도모해주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현봉학씨의 글에서). 그가 귀국할
경우 만들고 싶은 나라의 상이 이러했으리라는 점은 쉽게 추론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