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속개된 12.12 및 5.18 공판(4차)에서 은 80년 11월 「언론
통폐합」의 구체적 추진과정 등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에 따르면 보
안사는 80년 9월하순부터 계엄해제후 언론대책의 일환으로 언론사 통폐
합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상재 보안사언론대책반장(당시직책·이하 같음)이 「언론 건전육성
종합방안 보고서」란 제목의 통폐합안 작성을 마친 것은 80년 10월. 노태
우보안사령관은 같은 달 중순 에서 권정달 정보처장에게 언론통폐
합안을 보고하게 했다. 참석자는 대통령을 비롯, 노씨,
비서실장, 이웅희 공보수석과 수석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 허삼
수씨 등 6명.
그러나 통폐합안에 대해 김 비서실장, 이 공보수석 등이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노 보안사령관도 의외로 반대의견을 나타내자 전 대통령은 일
단 보류를 지시했다.
그러다 80년 11월12일 오후 노씨가 예하부대 순시차 강원도 속초에
가 있던 중 이광표 문공장관이 급히 연락을 해 왔다. 『언론통폐합에 관
한전 대통령 결재서류를 갖고 왔다』는 내용이었다. 오후 4시쯤 노씨가
헬기편으로 상경하자 사령관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 문공장관은 『언론
사주로부터 포기각서를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은 『노씨가 「문공부가 결재를 받았으면 직접 처리하지 않고 왜
우리에게 악역을 맡기느냐」고 화를 냈다』고 이날 신문과정에서 밝혔다.
하지만 노씨는 이날 신문에서 『악역이란 단어를 쓴 적은 없다』고 부
인했다. 노씨는 그러나 『그런 지적을 한 적은 있다』고 시인했다.
어쨌든 이 문공이 『대통령이 보안사의 협조를 받으라고 했다』고 대통
령의 지시임을 강조하자 노씨는 곧 한용원 정보처장과 김충우 대공처장
을 불러『언론사 사주들을 불러 신속히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두 처장은 같은 날 오후 6시쯤 언론사주들을 대공처 주관하에 보안사
로 소환했고, 「통폐합조치에 이의가 없다」는 내용의 포기각서를 강요했
다.
지방언론사주에 대해서는 따로 정보처 주관하에 각 지역 보안부대에
서 포기각서를 받아냈다. 포기각서는 보안사에서 미리 문안을 준비해뒀
다가 언론사주들로 하여금 문안대로 각서를 작성케 했다. 결재에
서 통보, 각서작성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반나절이었다. 언론통폐합에
「강제」가 없었다고 강변해온 신군부측의 주장이 모두 거짓으로 드러난
셈이다.
대통령의 하야과정과 관련해서도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검
찰은 노씨에게 『김정렬 전국방장관이 노 피고인 등 신군부측의 부탁을
받고 최대통령을 수차례 만나 하야를 권유한 적이 있느냐』고 추궁했다.
노씨는 그러나 『잘 모르는 얘기』라고 부인했다.
81년 1월 씨의 무기징역 감형은 노씨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
으로 밝혀졌다. 노씨는 신문에서 『친구(전씨 지칭)가 국정책임자가
됐는데 그의 정적도 아닌 김씨를 사형시키면 자칫 독재자라는 구설수에
오르고 혼란이 야기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5공헌법 개헌안 확정과정에서 노씨는 국보위법사분과위원을
통해 우병규 정무수석비서관에게 헌법부칙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것으
로 수사결과 드러났다. 당시 헌법부칙은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 정치규
제법 도입 등 5공 출범의 핵심뼈대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노씨는 또 최 대통령 하야 직전인 80년 8월7일 수경사에서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안보간담회를 개최, 3김씨를 비난하며 전씨를 새로운
정치지도자로 추켜세우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