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다시 멀쩡한 우리 땅 를 자기네 땅이라며 생떼를 쓰고
있다.

우리의 동해를 「해」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2차대전 패전후
잠잠했던 영토에 대한 야욕이 불쑥 불쑥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이럴
때면 깊숙히 가지고 있던 사료들을 꺼내놓고 『이래도 이 땅이 너희 것
이냐』고 일격을 가하는 사람이 있다.

이종학씨(70)는 지난 2월말 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뒤집는 사
료들을 한꺼번에 발표했다. 은 주인없는 섬 를 죽도(다케시마)
라는 이름으로 1905년 2월 도근(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한
다. 이 사실은 시마네현 지사 이름으로 고시됐는데 그때 너희가 왜 항
의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씨는 현청 바로 앞에 있던 지방신문사인
산음신문조차 이 사실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고 자료를 제시하면서
『너희도 몰랐던 고시를 물 건너 조선에서 어떻게 알고 항의했겠느냐』고
반박했다. 그는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5월 29일 독도 부근의 해전을
전하는 관보 호외, 1905년 9월 18일 부산주재 영사관의 울릉도 현
황 보고서를 또다른 증거자료로 제시한다. 해전보고는 를 리앙고루
암이라고 표기했는데, 이는 19세기말 함대가 이 근처를 지나가다
자신의 함대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 가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일
본에 편입된 사실을 관보에서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다. 또 영
사관은 울릉도민들이 매년 4∼6월 부근에서 물개를 잡는다며 리앙
고루(독도)를 울릉도의 속도로 보고했다. 이는 『타국이 점령한 적 없는
주인없는 땅이라 에 편입했다』는 주장을 스스로 뒤집는 증거다.

=== 지칠줄 모르는 「70 청춘」 2층집 전체가 서고겸 서재 ===.

그가 이 자료를 수집한 것은 7∼8년전. 이 문제를 들먹일
때 「무기」로 꺼내놓기 위해 가지고 있었다. 『서류상 를 저희 땅으
로 만들어 놓은 후인 러일전쟁 당시 가 어떻게 표기됐는지 찾기위
해 당시 에서 발행됐던 일간지 1백4개를 모두 뒤졌어요. 하나도 예
외없이 「리앙고루」로 써놓았더군요. 만약 저희 섬 「다케시마」로 알고
있었다면 외래어 「리앙고루」를 썼겠어요?』.

수원시 서문에 있는 그의 집 거실에 들어서면 크게 확대한 사진 두
점이 걸려있다. 사진과 이순신이 왜군에게 항복을 받았던 통영(현
재 충무시)에 서있던 수항루의 사진이다. 수항루는 일제초기 헐렸는데
그 직전에 찍은사진. 그는 이 사진을 발굴해 국사편찬위원회, 정신문화
연구원, 총무처 등 20개 기관에 나눠줬고, 지금은 충무에 이 누각이 복
원돼 있다.

이순신과 독도. 이 둘은 일흔의 나이에도 그를 지칠 줄 모르고 뛰게
하는 힘이다. 『이순신장군의 정신이 없으면 를 지킬 수 없다고 생
각합니다.』 그는 실제 이순신장군의 정신을 받아 사료를 무기로 지금
과 전쟁을 하고 있다. 이 우리나라 동쪽의 바다를 「해」라
고 들고 나왔을 때 그는 당장 자신이 그 바다를 「조선해」로 그려
넣은 지도를 내밀며 『너희가 이렇게 그려놓고 무슨 딴 말이냐』고 들고
나왔다. 그는 언제나 『객관적인 자료를 놓고 어디 따져보자』며 과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는 집 2층 전체를 털어 서고겸 서재로 쓰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등 역사서부터 서양인들이 조선에 관해 쓴 책, 병풍으로 돼
있는 고지도, 고서적과 지도, 조선총독부 때의 자료, 신문 스크랩
등으로 꽉 찬 서고는 바로 「사료의 보물창고」였다. 그는 새벽 4시면 눈
을 뜬다. 5시까지 목욕을 다녀와서는 9시까지 신문을 읽는다. 그가 매
일 읽는 신문은 8가지. 이 우리나라를 들쑤실 때마다 적재적소의
자료를 발표하는 그는 『기사 감각이 기자 이상』이라는 평도 듣는다. 일
본과의 여론대결을 위해 매스컴을 이용하는 것같이도 보인다.

『19세기초 에서 나온 「바다의 장래」라는 책이 있습니다. 「현재
인구가 3천5백만인데, 계속 불어나면 이 영토로는 살 길이 없다. 우린
이제 바다의 조그만 바위라도 선점해야 한다」는 내용이지요. 그들이 독
도가 우리 땅인줄 몰라서 그러는게 아니예요. 계속 들쑤시다가 때가 되
면 행동으로 옮길 것입니다. 가 확실히 우리 것이라는 자료를 확보
하고 있어야 도 국제여론을 의식해 함부로 못합니다.』.

그는 일생에서 제일 기뻤던 일을 두가지 꼽는다. 첫번째는 해방이
됐을 때고 두번째는 1990년 시마네현을 찾아가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을때다. 자료발굴을 위해 에 갔는데, 『는 조선보다
본토에서 10마일 가까워 편입시켰다』는 지방관청의 기록이 있었다. 그
런데 또 다른 자료에는 그게 10리로 돼있었다. 『그곳 관리를 만나 「10
리와 10마일이 같으냐」고 따졌죠. 또 「만약 본토에서 가까운 것만 따지
면 대마도도 우리 땅 아니냐」고 일격을 가했더니 「공부를 안해 모르겠
습니다」며 외무부에 물어보겠다고 대답하더군요.』 시마네현뿐 아니라
곳곳에 『다케시마(독도)는 고유의 영토입니다』 『다케시마야
돌아오라 섬과 바다야』 『어업권 확보를』 등 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구호판들이 서있다.

그에게서는 도저히 일흔의 노인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여섯시간 쉴
새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지칠줄을 몰랐다. 흰 머리 하나 눈에 띄지 않아
『염색하셨느냐』고 물으니 『그런 소리 하지 마슈』라며 펄쩍 뛴다. 잔글
씨를볼 때도돋보기를 사용하지 않는 시력이다. 『워낙 열중하는 일이 있
으니까 나이가 그냥 지나쳐 버렸는가』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지금도
하루를 시간단위로 쪼개 사는 그는 『이제 덤으로 사는건데, 무서운게
없지. 못할 일이 뭐가있겠소?』한다. 자신이 갑자기 죽을 때를 대비해
중요자료가 어디어디에 있는지는 외동딸에게만 알려 놓았다. 사진을
찍는 동안 그는 『내 표정이 굳지? 굉장히 사납지?』 하더니 『과 싸
우려면 그래 보여야지. 내가 옛날에는 여자들 앞에 서면 수줍어 말도
못할정도로 숫기가 없었는데, 과 싸우다보니 이렇게 됐어』한다.

그 힘의 원천은 무얼까. 그는 바로 이순신장군에게서 나온다고 말한
다. 『이순신장군 정신의 핵심이 영토수호 아닙니까. 그 분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 영토에 관심을 갖게 됐고, 독도 뿐 아니라 조선말 남의 손
에 의해 넘어간 간도, 녹둔도, 신라때까지 우리 땅이었던 대마도에 대
한 자료를 계속 모았습니다.』 .

/// 아직도 공개안한 이순신장군의 「한산섬…」 친필 시조 ///.

그는 30년간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귀중한 자료가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이순신장군의 친필 시조다. 우연한
기회에 이걸 손에 넣은 그는 그만 그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는 누구에
게나 『나는 이순신장군을 신앙으로 모신다』고 말한다.

그의 일생을 바꾼 그 친필을 만난 것은 1966년 그가 앞에서
서점을 하고있을 때였다. 신촌부근 대학 도서관에 납품을 하면서 고서
들을 만졌고, 자꾸 만지다보니 보는 눈도 생겼다. 1927년 수원에서 태
어난 그는 농사지으며 학교 다니느라 16∼17살에야 보통학교를 졸업했
다. 해방직후 고등고시를 목표로 건국전문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다
공군에 입대한 그는 『휴가나올 때면 이 서점 저 서점을 다니며 책을 읽
는게 낙이었다』고 한다. 워낙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어릴 때부터 무슨
책이든 손에 잡히기만 하면 처음부터 끝장까지 샅샅이 읽어 치웠다. 제
대후에는 돈을 벌면서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시골 땅을 팔아 종로
5가에 서점을 차렸고 20년 가까이 그 일을 했다. 『정신없이 책을 읽느
라 파는 것을 잊을 때도 많았죠.』.

그러던 어느날 한 노인이 찾아와 조선총독부에서 나온 식물관련 책
두권을 내밀었다. 옆 빵집에서 빵과 우유를 사드리고, 부르는대로 값을
다쳐서드렸다. 그 할아버지가 일부러 다시 서점으로 전화를 걸어 『집에
좀 놀러오라』고 했다.

『2층 서고가 고서들로 꽉 차 있었어요. 그걸 보여주며 「이제 이 책
주인은 당신이니 다 가져가라」고 하시더군요. 얼마전 만난 점쟁이가 이
제 얼마 못사시니 주변을 정리하라고 했다구요.』 그 자료들을 열차례에
거쳐 트럭에 실어나르던 어느날 그 분이 신문지로 둘둘 말려있는 자료
를 내밀었다.

집에서 끌러보니 다른 자료와 함께 이순신 친필이 들어 있었다. 그
때까지 그 시조가 1595년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1597년에 쓴 것으로 적혀 있었다. 알고 지내던 몇몇 국문학자와 서지학
자들을 집으로초청해 진품 판정도 받았다.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의 통
설이 이렇게 틀릴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만 안맞겠는
가」하는 의심이 들었고, 제가 직접 자료 발굴에 나서게 된 거지요.』.

그후 그는 초서체로 쓰여진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복사해서 1백번쯤
은 읽었다고 말한다. 『어려서 서당을 좀 다니긴 했지만, 초서체를 반복
해서 읽으면서 한문공부가 많이 됐습니다. 그게 고서연구에 큰 힘이 됐
지요.』 난중일기를 자세히 보니 연대가 딱 들어맞더라고 그는 말한다.

『시조를 쓰던 그때그분의 심정이 읽혀지는 듯했어요.』 「달이 밝다」 「잠
을 못 이뤘다」 「수루에 올랐다」 등 난중일기 중간중간에도 시조를 읊던
심정이 엿보였다. 이 친필은 4백주년이 되는 내년에 공개할 예정이다.

그후 그는 자료를 통해 이순신장군의 용모부터 인간적인 면면까지
꾸준히 추적하고 있다. 『이순신과 함께 싸운 중국의 해장 진린은 그에
대해 「땅을 주무르고 하늘의 해를 씻기는 재주가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50년전 의 해군 준장 사다 데쓰다로는 이순신을 동서양 고금의 명
장들과 비교연구하면서 「그와 견줄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 에서
조차 그렇게 알아주는 영웅의 진면목을 우리는 너무 모르는 것같아 안
타깝습니다.』 이순신과관계된 이야기라면 얼굴이 벌겋게된채 한문, 일
본어 원문을 줄줄 외면서 이야기를 한다. 어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을 듣
고 마음이 불안해 한번 다녀왔으면 하지만, 끝내 떠나지 못하는 대목에
서는 그의 인간적인 고뇌가 느껴져 언제나 눈물이 난다고 한다.

=== 자료 찾으러 만 40∼50차례 다녀와 ===.

그의 자료발굴은 이순신과 독도 외에 동학, 한일합방 등 각 분야에
걸쳐있다. 어떤 책에 관련문헌이나 지도를 언급한 것을 보면 한국과 일
본의 고서점 도서관 박물관을 샅샅이 뒤져 기어이 찾아 내고야 만다.

하나를 찾는데 1∼2년이 걸리는게 예사다. 자료를 찾으러 에 건너
간 것은 40∼50차례. 고서점들은 아예 자료를 챙겨뒀다 『이런 것
도 필요하냐』며 내놓기도 한다. 도서관에서도 하도 쑤시고 다니니까 그
가 나타나면 『저기 다케시마(독도) 왔다』고 쑥덕거리기도 한다. 한일합
방직전 정황을 보여주는 「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은 궁내부
도서관에서 찾아낸 것으로 대출이나 복사가 금지된 것이었다. 몰래 훔
쳐내 복사하고 다시 갖다놓았는데, 긴장이 돼 입술이 다 터졌다고 한다.

1988년 안중근의사가 갇혔던 여순감옥을찾을 때도 외국인 금지지역을
뚫고 들어갔다. 그는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얻은 자료를 꼭 필요한
곳에 아낌없이 나눠준다. 그의 자료 중 많은 수가 독립기념관, 현충사,
동학혁명 기념관 등 곳곳에 가 있고, 자료는 울릉도에 세워질 독도
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뿐 아니라 대마도 간도 녹둔도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 영토관을
세웠으면 했는데…』 그는 두만강변 녹둔도는 구한말 중국이 에
넘겨준 땅으로 불과 1백년밖에 안됐는데, 이제 누구 기억하는 사람이
있느냐며 『이렇게 영토의식이 희박해서 되겠습니까』라며 안타까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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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
1966년∼ 이순신-등 사료발굴에 몰두
1969년 경영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