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담한 내환 (53) ====.
왕비는 한순간 얼굴을 유화하게 고치고 말했다.
『희소식을 전해주어 고맙소. 내 잊지 않으리다.』.
심상훈은 하직인사를 올리고 서울에 돌아갔다.
희소식이긴 했으나 날짜는 맞지 않았다. 또 진짜 희소식이랄 수도 없었
다. 국상중엔 왕비는 살아 있는 몸이 아니다. 헌데 보름날 밤, 대가집 하
인행색의 허우대가 큰 장정이 불쑥 나타났다. 이댁 주인이 바깥사랑에서
응대하더니, 장정을 안으로 인도했다.
『마마 죽동궁에서 심부름온 사람이오이다. 만나보시지요』
민응식의 말.
왕비는 대청에 나갔다.
죽동궁은 민영익댁이다.
『그래 이름이 뭣이냐?』
『이용익이라 하옵니다. 본디는 보부상이었는데 지금은 영감댁을 출입
하고 있나이다.』.
『그래 영익이는 무사하다더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직 시골에 계시오이다. 중전마마, 여기 대전에
서 내려온 봉서가 있으오이다.』
이용익은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 민응식에게 올렸다.
『천추에 한이 맺힐 화난을 당했소. 심상훈을 통해 중전의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가 보고 싶은 마음이 태산같았소. 지금 나라의 형세는 내일을
알수 없는 혼돈이 계속되고 있으나, 반드시 조종의 가호가 있을 것을 의
심치 않소. 하루바삐 원상이 회복되어 중전이 환궁하기만을 고대하오.』
언문으로 쓴 국왕의 친필이었다.
왕비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방안에 들어갔다.
이용익은 2백리길을 하루에 달릴 수 있었다. 왕비가 환궁할 때까지 두
세차례 서울과 장호원 간의 보발 노릇을 한다.
국왕과 왕비의 비밀대화를 중개한 것이다.
무당의 예언은 신통했다. 왕비가 혹해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장면을 서울로 옮긴다.
청국은 전후 4천의 병력을 조선에 출병시켰다.
북양함대의 군함 4척으로 10여척의 기선을 호위하고 남양만 마산포에
진입하여 마산포를 상륙지점으로 삼았다.
이때 군 약 1천이 인천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건충도 남양만에 있었기 때문에, 접견대의 조영하는 김홍집과 함께
그곳으로 내려가, 마건충과 절충을 계속했다.
더운 날 탓에 양륙작업이 지연돼 마건충은 몹시 초조해하고 있었다.
한시바삐 서울에 진출하여 군의 책동을 제압하려는 것이었다. 조영
하와 마건충은 필담으로 의사를 소통한다. 북새통에 중국말 통역을 데려
오지 못한 것이다.
청국정부의 의도는 명백했다.
군란을 빌미로 조선과 의 관계가 험악해져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서
울은 군에 점령당할 것이다. 청국으로서는 수수방관할 수 없는 중대
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하루속히 군란의 뒷수습을 마무리 짓게하여 분
란의 확대를 방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자면 을 완강하게 배척하는 대원군을 제거하는 것이 급하다.대
원군을 내쫓고 조선국왕의 친정을 통해 과의 관계를 조정하지 않을수
없다.
군란 처리에 있어서는 먼저 주동자들을 수색-체포하여 엄중히 처단해야
한다. 이같은 청국정부의 방침은 조영하의 심회를 착잡하게 했다. 조선을
속방 혹은 보호국으로 치부하려는 저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청일양국군이 남의 집 안마당에 난입하여 서로 으르렁 거리
고 있다. 이것이 눈앞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