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연대, 유럽통합 다진'세기의 정객'
3수 끝에 집권 14년 재임 최장수 --- 3선 스스로 포기
동거정부로 정치 안정... 92년엔 핵실험 일방 중단도
내외신 기자들과 신년하례식이 약속된 8일 오전11시 상기된 표정으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엘리제궁 연회실의 연단에 섰다.『오늘 아침 프랑수아 미테랑이 우리곁을
떠났습니다.』 역사와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넘겼던 미테랑이 숨을 거둔지
불과 2시간30분이 흐르고 있는 시각이었다.
시라크는 이 자리에서 읽은 짤막한 애도성명에서 『미테랑은 의 연대를 강화
하고 유럽건설의 토대를 다진 지도자』였다고 추모했다.후임자가 황망하게 요약한
전임 대통령의 업적은 사실상 그 두가지가 가장 두드러진다.
미테랑은 81년 「인민전선」 시절 이후 처음으로 좌파가 집권한 것을 계기로
의 모습을 많이 바꾸어놓았고 그 철학적 기저에는 연대(솔리다리테)의 이념이 흐
르고 있었다.
미테랑은 기간산업 국영화,60세 퇴직정년제,년5주 유급휴가 등의 경제적 변혁 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탈중앙화 정책,사형제 폐지,지방분권화 등을 실시했다.
60년대 중반부터 미테랑은 2차대전 이후 제5공화국에서 처음으로 드골장군
의 대체가능 인물로 떠올랐던 정치인이다.그후도 퐁피두와 데스텡에게 두차례 엘
리제궁을 먼저 내주긴 했으나 그는 결국 14년 최장수 대통령의 기록을 세우고 작
년 5월17일 자신의 발로 엘리제궁을 걸어나왔다.
이를두고 언론들은 『역사의 심판을 비켜간 인물』이라고 미테랑을 평가했
다.재작년 선거운동 열풍을 타고 그가 3번째 임기를 시도할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
왔을때 미테랑은 이를 일언지하에 일축했다.
『아무도 오늘에서 내일로 건너지 못한다.씨를 뿌림과 거둠은 각각 따로 있다.역사
의 계단이 신문의 계단처럼 돼 있는 건 아니다.』 이는 50년 정치인생에 35년동안
의원생활,각료직 11번,14년 동안 대통령직을 마친 세기적 정객 미테랑의 어록이
다.
미테랑은 1916년10월 자크나르의 보수적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18살때 로
상경,법률을 공부했다.『수줍지만 야망에 찬 청년』 미테랑은 이 시절 페텡 장군의
「국가혁명론」에서 장 조레스의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사상적 전이를 보여준다.
정치,경제,사회,문화,국방,외교 등 전방면에 여러가지 변화를 몰고온 미테랑이지
만 그가 유럽통합에 「투사」적 정열을 불태웠다는 것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
다.이것은 그가 두번째 임기를 맞은 88년부터 국내 정쟁에서 물러서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그는 헬무트 콜 독일총리와 어깨동무를 한듯이 유럽
통합을 주도했다.
국내 정치적으로 이 시기는 유일하게 「단합 」라고 불리기도 한다.이때는 사
화당과 중도우파가 힘을 합했던 시기다.
미테랑은 정권 말기에 과거 전력이 문제가 되기도 했고,숨겨놓았던 혼외 여식이
언론에 보도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그의 전력이란 그가 비시정권 시절,교도관
리로 근무했던 일을 말한다.앞서 40년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가,41년 3번의 시도끝
에 탈주에 성공하고 또 42년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치긴 했으나 단 한차례 비시
정권의 관리로 일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흠집이었다.
그러나 미테랑은 해방과 함께 드골의 15명 각료중 한명으로 입신하는데 성공하고
있으며 그해 다니엘 여사와 결혼을 했다.
그가 의 21번째 그리고 제5공화국의 4번째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보여준 여
러 정치적 수완과 위기극복 능력은 세계적인 모델이 되기도 했다.그는 71년 에피
네이에서 열린 사회당 전당대회때 당권을 장악한 이후 5년 동안 공산당과 연합을
꾀하면서 정치력을 키웠다.
대통령이 된후 그는 총선패배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우파 다수당에서 총리를 영입
하는 「동거정부」(86년 자크 시라크,93년 예두아르 발라뒤르)를 운영했다.그러나
사회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을 때는 엘리제궁의 지지가 흔들릴 때마다 총리는 대
통령의 「정치적 퓨즈」로 끊겨나가야 했다(모루아,파비우스,로카르,베레고부아
등).영국의 「더 타임스」紙는 이런 미테랑을 두고 「대륙의 여우」라고 혹평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미테랑은 에서 「神」 혹은 「아저씨」라고 불릴만큼 절대적 위치를 지
켜왔다.92년 핵실험을 일방적으로 중단한 것도 그였고 그 여파가 다른 핵강국에
퍼져나갔다.미테랑은 당대의 문장으로 알려질만큼 탁월한 문학가였고,의 시가
지도를 바꾸어놓을만큼 「미테랑의 大役事」로 갖가지 문화적 건축붐을 일으켰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거장이 무대를 떠나는 광경에 손색이 없었다.92년,94년 두차
례 전립선암 수술을 받으면서 그 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이 내려졌을 때 그
는 『내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잘안다』고 국민앞에 고백하면서 『그러나 임기
를 마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작년 5월 전승 50주년 연쇄 기념식이 ,,,모스크바 등지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때 미테랑은 세계 지도자들의 맏형으로써 마지막 소임을 다
했고,같은달 17일 자크 시라크의 손을 잡아흔들어주고 엘리제궁의 마당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우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나는 인생과
시간의 방향 그리고 그 의미를 안다.이런 점에서 국민들의 신임을 얻었으니 특권
받은 자가 아닌가.』 <= 김광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