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산리 백제유물 발굴 의미---------
### 용봉향로 제작연대 암시...불교사 연구에 새 장 ###.
백제의 역사는 아직도 고요히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러
나 뜻하지않게 발굴되는 유적들은 조금씩 그 베일을 벗기며 우리를 충
격과 감동에 휩싸이게 한다.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은 백제 웅진시
대의 찬란한 문화를 유감없이 보여주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작년에
발굴된 세계 최대의 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극히 정교하고 화려하며 역
동적인 운동감으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백제 사비시대
의 문화수준을 가늠할수 있게 하였다.
그 향로가 발견된 유적은 금년 7월에 다시 발굴조사를 계속하여
전모가 드러나자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일직선상에 배치된 절
터임이 확인되었다. 목탑지의 기단이 드러났을 때 나는 이곳에서 교란
되지 않은 백제 최초의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를 마음속 깊이 소망해 바
라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심부를 파내려가면서 그 내부가 교란되었
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74㎝의 아치형 사리장치가 수습되었으며 앞면에 명문이 새겨져 있
어서 나를 흥분시켰다.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
라는 스무글자는, 백제가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긴후
의 역사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글씨는 아치형 사리감 양옆에 글씨지름 7㎝ 내외의 크기로 새
겨져 있는데, 예서체맛을 지닌 해서체로 또박 또박 단정하다. 역시 육
조의 해서체를 백제나름으로 소화한 격조높은 글씨이다. 백제 창왕(창
은 위덕왕의 휘)13년(567년)에 위덕왕의 누이되는 형공주가 사리를 공
양했다는 짤막한 내용이지만, 이것은 이 사찰의 건립연대를 알려줄 뿐
만 아니라 금동용봉향로의 제작연대도 암시하여 주는 중요한 기록이라
하겠다.
이 기록으로 보건대 이 사찰은 위덕왕이 부왕인 성왕의 능을 위하
여 그 곁에 세운 능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금할수 없다. 성왕은 538
년에 수도를 협소한 웅진에서 사비로 옮겨 국력을 회복하여 잃었던 영
토를되찾아 백제의 중흥을 꾀하다가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영웅적
인 왕이었다. 한편 성왕은 중국 양으로부터 불경-공장-화가 등을 청하
여 선진의 문화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백제의 가장 찬란한 불교문화
를 확립하였으며 백제의 불교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잇대어 그
아들 위덕왕은 일본에 조불공-조사공-경론-진사 등을 보내 일본불교문
화의 기틀을 잡게 하였다. 그러니 6세기 후반은 국제적으로 매우 중요
한 위치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백제적인 문화를 확립한 시기였다
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궁궐과 사원들을 지어 새 수도의 면모를 갖
추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보 83호 금동삼산관반가사유상도
위덕왕대에 만들어 진 것이며 정림사도 건립되었다.
그러한 국력의 기반을 다진 성왕을 위하여 위덕왕이 능사를 세웠
으리라는 짐작은 무리가 아니다. 비록 명문에는 성왕의 따님이 사리공
양하였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왕실에서 발원하였다고 해석해야 할것이
다.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왕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동명성왕의 능도
이전하면서 그 옆에 웅대한 규모의 정릉사를 건립한 바 있다. 지금 능
산리왕릉들 가운데 하나는 무령왕의 전축분 형식을 따른 석실분이어서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능이니만큼 그 아들 성왕의 능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시호를 성이라 한것도 그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
여라고 고치면서 새 나라의 웅비를 폈던 그의 위엄에 걸맞는 시호라
하겠다. 아마도 금동용봉봉래산향로도 위덕왕이 이 릉사를 건립하였을
때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만든것이 아닐까.
이 아치형 사리석함의 형태와 그 안치방법은 동아시아에 유례가
없는 특이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백제의 제석사나 신라의 황룡사에서
처럼 목탑에서는 심초를 쪼아내어 사각형 사리석함을 만들어 사리함을
봉안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남북장방형 심초위에 기둥
을 세우고 그 앞에 남쪽으로 향하여 사리석함을 세웠다. 그리하여 앞
면을 아치형으로 감실을 만들고 뒷면에도 역시 아치형 감실을 만들었
다. 앞면의 것은 턱을 만들어 문을 장치하도록 하였고 뒷면에는 턱이
없이 바로 기둥에 대도록 하였다. 나는 그 뒷면에는 백제에서 흔히 하
듯 제석사나 관궁사(왕궁리사지)의 탑에 봉안했던 금강반야경을 압출
한 동판이나 금판을 납입하였고, 앞면에는 사리가 들어 있는 유리병을
넣은 금속제 사리장치같은 것을 봉안하지 않았을까 본다. 앞면 감실은
문을 장치하였을 것이므로 그것은 마치 유가에서 감 속에 위패를 봉안
하는 형식을 떠오르게 한다. 또 사리석함의 아치형감실은 성왕릉의 아
치형 구조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번에 출토된 소조불상은 이
감실에 사리와 함께 봉안했을지도 모른다. 심초 주변에서 수습된 수많
은 금귀고리, 유리구슬, 옥제품 등은 이 탑을 건립할때 왕족들이 넣은
공양구로 생각된다.
명문이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사리석함의 발견으로 백제역사의 연
구에 큰활력을 불어 넣어 줄 뿐만 아니라, 서예사 연구와 불교사리 장
엄 및 불교조각사의 연구에 큰 기여를 하게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