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통령의 차명계좌 4백85억원중 무려 3백64억원이
「수표바꿔치기」라는 치밀한 돈세탁 과정을 거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금융 전문가들은 검찰의 발표와는 달리 4백85억원이라는 거금
이 제도금융권에, 그것도 한 은행 점포에 모이기까지는 돈세탁의 주체가
누구가 됐건 「수표바꿔치기」 말고도 동원가능한 모든 방법을 썼을 것으
로 보고 있다.
금융기관에서 통용되는 돈세탁 방법은 「수표바꿔치기」와 「현찰처리」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수표바꿔치기」란 금융기관이 나서서 예금주인 갑이 갖고온 수표를
다른 예금주인 을이 입금한 수표로 바꿔 갑의 계좌에 넣는 방법을 말한
다. 은행이 이 방법을 쓸 경우 자금거래가 많은 단자(투자금융)회사가
을의 역할을 흔히 맡는다. 단자회사는 금융기관간 자금거래인 「콜」이 많
아 변칙적인 수표이동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꾸미기 쉽다. 때론 갑의 수
표가 일반예금이 아닌 양도성정기예금증서(CD)나 기업어음관리계좌(CMA)
로흘러 들어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현찰처리」는 A라는 은행에 예금주 갑이 B은행 수표를 갖고와 마치
현찰로 바꾼 것처럼 한 뒤 가상의 현찰을 즉시 가명계좌로 입금한 것처
럼 처리, 같은 금액의 A은행 수표를 갖고 가는 방법이다. 이는 은행까지
개입한 변칙거래이지만 갑의 수표가 순식간에 익명의 현찰로 뒤바뀌는
셈이 되기 때문에 구린 돈의 꼬리를 감추려는 「큰손」들이 많이 쓴다.
두 방법은 수표가 여러장으로 쪼개지거나 합쳐지는 결과가 흔히 생기
기 때문에 「맞바꾸기」 「쪼개기」 「붙이기」라고도 불린다. 돈의 추적을 어
렵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기도 하고, 갑과 을의 수표금액이 서로 일치하
지 않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이 두 방법은 모두 금융기관의 적극적인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감추고 싶은 돈의 규모가 「적당한 규모」의
거액일 경우 사용된다. 기천만원대 이하의 수표는 진짜로 은행에서 현찰
로 바꾼 뒤 이리저리 돈의 꼬리를 감추면 되지만 억대가 넘는 수표는 쉽
사리 현찰로 바꿀 수 없고, 설사 그랬다고 해도 금방 표시가 난다. 아무
리 큰 시중은행 점포라 해도 매일 보유하는 현찰의 평균액은 4억∼5억원
에 불과하다.
「수표바꿔치기」는 최종 은닉계좌에 돈을 넣을 때 쓰이기도 하지만
「현찰처리」는 주로 돈세탁의 중간과정으로 동원된다는 결정적인 차이점
이 있다. 은행을 구슬러 어렵사리 「현찰처리」한 수표를 곧바로 은행계좌
에 넣으면 금방 수표의 향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재 검찰은 노 전대통령의 비자금 계좌는 서소문지점 차장
2명이 직접 나서서 「수표바꿔치기」 수법으로 돈세탁을 했다고 밝히고 있
다. 비자금 관리자인 전 경리과장 씨(49)가 갖고온 수표를
다른 고객의 계좌에 넣고 대신 다른 고객의 수표를 이씨의 계좌에 넣는
방법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은행 전문가들은 그것만으론 설명이 안된다고 고개를 갸우뚱
한다. 무엇보다 「바꿔치기」를 한 금액의 규모가 크다는 점이다. 한 시중
은행 지점장은 『여러날에 걸쳐 수십차례로 나눠 「바꿔치기」를 했다고 해
도 단위금액이 억대에 이르고 그것도 한 점포에서만 이뤄지면 수표추적
이 결국은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금융 관계자들은 오히려 신
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입금되기 전단계에 이미 「세탁」이 끝난 수표도 많
을 것으로 보고 있다.
노 전대통령측이 직접 나서서 세탁한 것 말고도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이나 개인들이 스스로 돈세탁한, 「적당한 단위금액」의 수표를 그대
로 입금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검찰이 24일 밤 9개 시중은행과 2개의 단
자회사 등 11개 금융기관에 대해 추가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은 것도 이
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 경우 「현찰처리」 수법이 주로 동원됐을 것으
로 보인다. 노전대통령이 비자금을 에 예치한 시점이 금융실명
제가 시행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가명거래가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점이
주요 논거중 하나다.
한 은행 임원은 『검찰이 「현찰처리」도 「수표바꿔치기」와 같은 범주에
넣어 발표했는지도 모르겠다』며 『하지만 전혀 「세탁」이 되지 않는 수표
도 일부 섞여 있을 것』이란 또다른 시각도 제시한다. 「대통령에게 주는
돈」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물론 서소문지점 전단계에 이미 「세탁」이 끝난 수표중에는
제도금융권 말고 은닉성이 보장된 채권이나 사채시장을 거쳐 「세탁」된
것도 섞여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의 비자금중 수면에 드러난 것으
로는 사상최대인 노전대통령 계좌. 수표의 뿌리들을 끝까지 캐보면 아마
도 「돈세탁수법」의 만물상이 드러날 것이란 시각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