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명제 직후 "저리-장기대출" 출현 ---
*** 수백∼수천억-연리 3제의도 ***
*** 고위공직자-정치인 통해 소개 ***
*** 대기업마다 비슷한 유혹...대부분 "5-6공 돈" 추측 ***.
봄기운이 한창이던 지난 4월 어느날 오후. 서울강남에 있는 모중견그룹
L모 회장의 사무실에 갑자기 두명의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한사람은 L회
장의 학교동문으로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정부중앙부처의 국장급 공무원이
었으나, 한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국장은 그 낯선 사람을 『과거정권의 특수자금을 관리하는 분』이라고
일단 소개했다. 그러면서 『특수자금의 관리가 어려워져 신용이 튼튼한 대
기업에 싼 이자로 빌려주고 싶다고하기에 한번 잘 의논해 보라』고 말했다.
그 낯선 얼굴이 제시한 특수자금의 대출조건은 연리 3와 연리6연리
3짜리는 「통일자금」으로 부른다고도 했다. 대출기간도 5년이상 10년까지
장기대출이 가능하다고 했다. 『회장님 대출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담보도
필요없다』고 말했다. 항상 자금이 쪼달려 간혹 연리 20에 육박하는 사채
자금도 마다않는 기업으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L회장은 처음부터 사기극으로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특수자금
이라지만 회장의 사인 하나만으로 거액을 장기신용대출을 해준다니 아무래
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개해준 사람이 신분이 확실한 중앙
부처의 국장급 공무원이었고, 『사인만 하면 당장 이튿날 돈을 회장님 통장
에 입금시키겠다』는 제의도 「일단 밑져봐야 별로 손해볼 것 없는」 제의였
다. 낯선얼굴은 또 자기들은 광화문에 사무실을 내고있는 일명 「광화문팀」
이라고 했다. 이 팀에는 안기부 재경원 국세청 등에서도 한사람씩
파견나와 있다고 주장했다. L회장은 이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렇게
조건이 좋다면 필히 「곡절이 많은」 돈임에 틀림없고, 잘못 받아 사용했다
가는 나중에 함정이나 낭패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해준 사인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점도 거
절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 낯선 얼굴은 지난 8월에도 또 한차례 L회장을 찾아왔다. 『이제 광화
문 사무실을 철수할 시기가 됐다』며 또다시 특수자금을 장기저리로 써 줄
것을 간청했으나 L회장은 다시 거절했다.
이런 류의 괴자금이 자금난에 시달리는 대기업들 앞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금융실명제 실시직후인 지난 93년 하반기쯤. 등장인물도 한사
람이 아니라 여러 인물, 여러 팀이었고, 그중 일부는 진짜 금융사기단으로
밝혀져 수사당국에 걸려들기도 했다.
웬만한 재벌그룹 또는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최고경영자치고 이런 제의
를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다.
모그룹의 한 임원은 『작년초 수백억원을 연리 8∼9에 써라는 제의가
잘 아는 사람을 통해 들어왔는데, 기업신용도에 따라 최고 5백억원까지 가
능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을 통해 이 자금의 주인을 수
소문해본 결과 5-6공자금이란 소문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다른 그룹의 J회장도 엇비슷한 제의를 받았다. 그도 정부 핵심부서의
고위 공무원의 소개로 괴자금 세일즈맨을 만났다. 처음에는 3천억원을 쓰
라고했다가, 나중에는 『신용도를 재조사 해보니 엄청나게 튼튼한 회사라는
판단을 내렸다』며 5천억원이상 쓸수있다고 제의해왔다. 『그래도 현직 고위
공무원이 소개한 사람이라서 딱잘라 거절하기도 그렇더군요.』 그래서 그는
자금부 직원을 시켜 미행을 시켰다. 그랬더니 신분이 불확실한 시중의 브
로커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다방에서 엇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경을 목격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후 J회장은 통일자금 제의를 거들
떠보지 않게 됐다.
국민회의의 ()의원은 작년초부터 작년말까지 삼성,한보 등
12개 기업을 상대로 수백억원에서 최고 2조원에 이르는 자금을 연5∼6의
저리로 최소 5년간 빌려주겠다는 제의가 있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금융
자산 종합과세 실시방침이 확정된 올들어서 괴자금의 출몰은 더욱 빈번해
졌다. 실명제와 종합과세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이자를 적게 받더라도 안전
한 대기업에 돈을 맡겨놓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최근에는 LG그룹의 회장 같은 대그룹 회장들까지 이런 제의를 받
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만나지 않을수 없는 고위공직자나 정치인들을 통해
소개가 들어온다는 것이 대기업 최고경영진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그러나
이들이 노리는 주 타깃은 너무 큰 대그룹보다는 어느 정도 신용이 있으면
서도 적당한 자금난에 시달리는 중견그룹과 제조업체들이라고 재계관계자
들은 말한다. 그래서 일부 중견그룹들과 제약회사들이 이 제의에 넘어가
실제 이 자금을 현재 쓰고있다는 소문도 재계에는 파다하다.
특히 이런 소문이 날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그룹은 한보그룹. 불과
3년전까지만해도 수서비리 사건에 걸려 파산직전에 몰려있던 그룹이 3년사
이에 상아제약, 유원건설 등을 잇따라 인수하고 무려 4조원이 소요되는 한
보철강 당진공장을 야심차게 짓고있는 배경에는 특수자금의 존재가 있다는
소문이다.
한보측은 물론 은행대출금과 회장의 개인자금에서 인수자금이 나
온 것이지, 괴자금과는 결코 무관하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비자금 존재가 드러난 이후부터 한보의 「5-6공 정권 특수자금 관
리설」이 다시 나돌고 있다.
재계에서는 노대통령의 비자금 존재를 계기로 이 괴자금도 단순 사채자
금이나 사기자금이 아니라, 진짜 실체가 있는 5-6공정권의 특수자금이 아
닌가하는 관측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모 재벌그룹의 한 자금관계자는 『모대기업의 경리전문가 한사람이 퇴직
후 연희동쪽에 스카우트되어 전직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해주고 있다는 소
문이 재계에 파다하다』고 밝히고, 『이 사람이 운용하는 조직이 광화문팀
같은조직이 아니겠느냐』고 추정하기도 했다.
많은 재계관계자들은 이 괴자금의 실체를 ▲진짜 5-6공정권의 특수자금
▲과거 정권과는 상관없고 종합과세만 피하려는 거액개인전주의 자금 ▲실
체가 모호한 진짜 사기성자금 등 세 부류로 일단 분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