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독립 주창 1세대/30년간 정치박해 해외서 민주화운동 지
난 24일 민진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팽명민(펑밍민.72)은 대만 독립
운동의 원조다. 대만 독립운동의 1세대와 2세대간의 대결이었던 민진
당 총통후보 경선에서그는 2세대의 선두주자인 허신량(쉬신량) 전주석을
압도적 표차로 굴복시키고 대권 티켓을 따냈다. 이에 따라 내년 3
월 총통선거는 이등휘(리덩후이)와 팽명민이라는 두 70대 노인간의 대
결로 압축됐다. 경선 과정에서 허신량은 중국과의 관계 증진과 경제력을
통한 중국 제압을 주장한 반면, 팽명민은 대만 공화국 건설을 내
세웠다. 팽명민은 지난 6월 당내 1차 초선때까지만 해도 허에게 근
소한 표차로 밀렸었다. 이들의 승부가 뒤집힌 것은 최근 중국의 잇단
군사훈련을 계기로 허신량 노선에 대한 회의가 일면서 당내의 신망이 팽
명민에게로 몰렸기 때문이다. 그는 경선후 기자회견에서 "여당인 국민
당은 그동안 중공과 몽골을 포함하는 중화민국이란 허상을 만들어왔다"고
지적하고, 자신은 대만공화국 건설과 새로운 헌법 제정을 통해 주권재
민을 구현할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유권자들
은 현명한 대안을 갖게 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만 공화국에 대한
그의 신념은 30년간의 정치적 박해 속에서 키워져 왔다. 대만대학
정치학교수이던 지난 64년 그는 제자들과 함께 대만인민 자구선언 을
발표, 군사법정에서 반란기도 혐의로 8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장개석(장제스) 총통의 사면으로 석방은 됐으나 끊임없는 감시와 사찰을
피해 70년 스웨덴을 거쳐 미국으로 피신했다. 이후 미시간대 연구원
시절에는 대만 민주화를 위한 해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이등휘와
깊은 인연이 있는 사이다. 동갑나기인 이들은 같은 시기에 일본에 유학
, 팽명민은 동경대에, 이등휘는 경도대에 다니다 46년에 함께 귀국했
다. 두 사람은 귀국한 뒤 대만대학에 함께 다니면서 밤새워 토론을 할
정도로 가까웠다. 92년에 팽명민이 귀국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등휘
가 국가안보회의를 설득한 덕분이다. 이들은 또한 같은 장로교 신자이기
도 하다. 그러나 팽명민이 이등휘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최근의
여론 조사에서 이등휘가 41%의 지지를 받은 반면, 그에 대한 지지는
무시할 정도로 미미하다. 30여년간의 해외 체류로 국민들과의 친화감
이 부족해 기팽보리 심리가 확산될 전망이다. 대만 공화국 건설을
내세우는 팽의 당선을 좌시할 중국도 아니다. 다만 그의 이번 출마는
70대들의 노인정치를 청산, 세대교체를 이루는 촉매제로 작용할 것으
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