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 동두천 제2사단 대대장 복무/카투사는 세계군요원중 최고수준
내년 미 대통령선거 출마를 고려하고 있는 콜린 파월 전미합참의장은
중령때이던 73년 가을부터 1년간 동두천에 주둔해 있던 보병 제2사단
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최근에 출간한 자서전 나의 미국여행
(My American Journey) 에서 당시의 회고담을 자랑스럽
게 털어놓았다. 다음은 그 요지. 편집자주 한국은 나에게 전쟁 그
자체였다. 13~16세 때 한국전쟁에 대해 자주 들으며 자랐다. 고
향의 이웃 형님들이 전쟁에서 돌아와 아직도 우마차를 타고 다니고 거름
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기는 후진국에서 벌어진 전쟁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오늘날 한국은 자동차에서 VCR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생산하는
경제 기적을 이룬 나라이다. 년 가을 한국에 부임하자 경제 기적은 이
미 시작되고 있었다. 서울은 키가 높아지고 있는 빌딩과 넘치는 기업
에너지로 충만했다. 그러나 도심에서 몇 마일 밖으로 벗어나면 판자촌과
채소밭이 즐비했다. 캠프 케이시(사단사령부)의 분위기는 삭막했다.
무단이탈자(AWOL)가 많았고 사기는 형편없었다. 고교를 중퇴한 세
사병이 여보 라고 부르는 한국여자와 부대주변의 아파트에서 동거생활을
했다. 이 경우는 그래도 매춘에 비하면 성병 방지 측면에서는 더 효
과적이었다. 야간사격훈련 때 나는 많은 한국인들이 탄피를 줍기 위해
사격이 끝난 사선으로 몰려드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아직도 뜨거운
탄피를 열심히 주웠다. 대대생활중 두번째 사격 때 한국인 1명이 탄
피를 줍다가 불행하게도 오발탄에 맞아 사망했다. 캠프 케이시에서 나
는 총잡이 라는 별명을 가진 사단장 헨리 에머슨 소장 휘하에 있었다
. 에머슨은 2사단의 군기와 사기를 회복시킨 전설적인 사단장이다. 그
는 훈시 때마다 "북한군이 DMZ를 넘어오면 엉덩이를 차버려"라고 말
하곤 했다. 그는 항상 전투태세를 갖출 것은 물론, 활력이 넘치고 도
덕적으로도 완벽한 군인상을 강조했다. 전부대원들에게 의무적으로 태권도
를 배우게 한 것도 그였다. 나는 청색띠까지는 땄으나 유단자가 되지는
못했다. 나의 부대에는 2백명 가량의 카투사(KATUSA.미군에
배속된 한국인 병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내가 군생활동안 지휘한 군인
들중 가장 우수한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지칠줄 몰랐으며 군법을 철두철
미하게 지켰다.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순식간에 배우고 익혔다. 그러
나 그들의 월급은 미군 병사 한 사람의 하룻밤 맥주값에 지나지 않는
3달러였다. 나는 대대원들에게 가능한한 우수보병기장(EIB)을 많이
받도록 독려했다. 그 결과 우리 대대에서 이 기장을 받은 사병수는
부근의 3개대대를 통틀어 합친 것보다도 더 많았다. 또 우리 대대는
연속해서 다섯 차례나 이달의 군인상 을 수상하기도 했다. 나는 지
금도 옛날의 무한한 우정, 속에 담아두기 힘들정도로 터져나오는 개성들
, 그리고 자유로운 기상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