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신라 팽창을 '민족분열'로 평가 문제제기 신라가 진흥왕때
비약적으로 영토를 넓혔던 6세기말에서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
약 1백년간은 우리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3국이 치열한 생존경쟁
을 벌였던 시기다. 그러나 남-북한 국사 교과서는 이러한 중대한 시
기에 대해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남-북한 국사교
과서는 3국 경쟁에 관한 서술에서도 극명한 시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 남한 교과서는 간략하나마 신라 성장기 3국의 부침을 서술하고 있
어 신라가 3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백제와
신라가 힘을 합하여 고구려를 밀어내고 한강 유역을 탈환하는 데 성공
한 것은 6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신라는 회복한 지역을
독점, 이를 일방적으로 신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 1백20
년간이나 지속되던 양국의 동맹관계는 깨어졌다. 신라는 진흥왕 때 화
랑 제도를 통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한편, 국력을 정복사업에 집중
시켰다.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중부 지방을 확보하였으며, 그 세
력은 함경도 지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남한 고교 국사 상권
39~40쪽 이러한 신라의 급성장은 통일 각축을 벌이던 3국의 상
황을 새롭게 전개시키는 상황을 만들었다. "6세기 진흥왕 때 신라의
비약적인 팽창은 삼국 간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즉, 백제와 신
라의 동맹관계가 깨어진 대신,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라에 압력을
가하는 상황으로 정세가 바뀌었던 것이다." 남한 고교 국사 상권
42쪽 반면 북한 교과서의 이 시기에 대한 서술은 자세한 배경
설명도 없이 외적의 침입을 물리친 고구려의 정의로움 과 민족을 분열
시키는 전쟁을 일삼은 신라의 부도덕성 을 강조하는 일방적인 해석과
주장을 펴고 있다. "7세기 중엽 세나라의 정세는 달라졌다. 이 시
기 고구려는 북쪽에서 끊임없이 달려드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있었다
. 그러나 백제와 신라 봉건통치배들은 한겨레의 나라인 고구려와 힘을
합쳐 외적을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같은 민족사이의 내부 싸움을
자주 벌여놓음으로써 세 나라가 단합하여 외적과 싸울 수 없게 하였다.
" 북한 조선력사 중권 2쪽 *외적침입 물리친 고구려 편중 서술
/진흥왕~3국통일 과정은 모두 '소홀' 신형식 이화여대 교수 서희
건 편집국 부국장 배경분석 서희건=중국의 수나라를 무찌르고 당
나라와도 자웅을 겨루던 고구려가 당의 침략을 물리친 지 불과 23년만
에 멸망하고 3국중 가장 약했던 신라가 한반도의 주인공이 되는 3국통
일과정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
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
각합니다. 북한 교과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남한 교과서도 이 부분을
너무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신형식=고구려는 수-당과
의 승리로 외부의 적은 물리쳤으나 국민계층간의 갈등과 사회모순이라는
내부의 적은 막지 못하였습니다. 신라는 비록 나라는 약했으나, 국민적
단합-멸사봉공의 희생정신-강렬한 국가관을 통해 통일의지를 잃지 않았
습니다. 무엇보다 투철한 국민의 단합과 생존을 위한 자각이 필요했고
이를 꾸준한 노력으로 성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서희건=신라가 3국경
쟁의 주도권을 쥐기 전 고구려와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신형식=광개
토왕 때는 고구려 군대가 경주에 주둔까지 하였으며, 장수왕은 평양천도
(427)이후 남하정책을 강화합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적 지
원이 필요하여 내물왕 37년(392)에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습
니다. 내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보낸 것은 고구려의 지원이 필요한 점
도 있었으나 왕위세습(부자상속)을 위해 자신의 큰 아들 눌지를 계승시
키기 위한 정략적 추방이었습니다. 실성은 자신이 고구려에 추방된 원한
을 갚기 위해 고구려 군대의 힘으로 귀국한 후 내물왕을 살해하고 왕으
로 즉위합니다. 그리고 그 보복으로 내물왕의 차남인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미사흔(미해.3남)을 왜로 보낸 바 있습니다. 그러나 내물왕
의 장자인 눌지는 도리어 실성왕을 죽이고 즉위하여 마립간이란 칭호를
쓰게 됩니다. 서희건=삼국은 발전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동맹을 맺기
도 하고 적으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특히 신라가 6세기 중반 한강유역
을 차지하게 된 것은 백제와의 동맹으로 힘을 모았기 때문으로 교과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제동맹이 맺어질 때와 깨질 때의 상황을 설명해
주십시오. 신형식=신라의 눌지왕과 백제의 비유왕이 나제동맹(43
3)을 맺은 데는 백제와의 연합으로 신라내에 잔존하는 고구려세력을 뿌
리뽑기 위한 눌지왕의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제동맹
은 단순히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는 신라-백제의 공수동맹이 아니
라,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려는 신라의 자립운동입니다. 그후
신라의 소지왕은 백제의 동성왕과 혼인동맹까지 맺고(493), 군사협조
까지 맺어 신라의 한강 중-하류 유역 탈취에 협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진흥왕 11년(550)에 단양을 점령하면서 한강 하류유역으로부
터 북진을 계속하여 553년에는 한강 하류유역을 차지하여 신주를 설치
하면서 나제동맹을 파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진흥왕 15년(554
) 관산성(옥천)전투에서 백제 성왕은 피살되고 나제동맹(433~554
)은 깨집니다. 신라의 한강하류유역 장악과 성왕피살사건의 주역은 김유
신의 조부이자 마지막 금관가야왕 김구형의 아들인 김무력입니다. 서
희건=남한 교과서는 나제동맹이 깨진 후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
라에 압력을 가하는 상황으로 정세가 바뀌었다 고 기술하고 있는데 당시
고구려-백제의 압력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신형식=진흥
왕 14년(553) 신라의 한강하류지역 확보는 3국의 정치판도를 바꾸
어 놓았습니다. 더구나 백제 성왕의 피살(554)과 고구려 양원왕 1
0년(554)의 대정란이 있었지만 양국은 신라의 팽창에 공동으로 대처
하기 시작합니다. 즉, 진흥왕 23년(562)이후 백제는 신라를 계속
적으로 침략하였으며, 선덕왕 11년(642)에는 백제-고구려 연합군이
신라의 당항성(남양만)을 탈취하여 대중국관문을 저지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신라의 국가적 고립은 외교적 탈출과 국민적 단합을 요구받는
상황이 됐던 것입니다. 서희건=다음번에는 3국통일과정에서의 신라와
당과의 관계에 대해 남-북한 국사 교과서의 서술을 비교해 볼까요.
정리=김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