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질 배경/왜곡된 반성문 국내 정치도구 로 전락/ 본심 아닌
선거전략차원 추진/자민-사회당,우익-노조 눈치보기 변명 일관
여야, 논점흐리기 과거를 반성하자는 국회결의 채택은 무라야마(촌
산부시)정권 탄생시 연립여당 합의사항이었다. 그 합의는 약 1년만인
9일 왜곡된 형태로 결실을 보았다. 진정한 국회결의에 관심이 없었고,
결의 자체를 국내정치를 위한 도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연립
여당내 역사관이 달랐다. 사회당은 "잘못된 것이 분명한 과거는 당연히
반성해야 한다"며 결의안을 마련했다. 신당 사키가케도 사회당과 유사
한 결의안을 준비했다. 반면 자민당은 "전몰자를 모욕하려느냐"며 과거
반성보다는 미래지향 적인 결의안을 각각 만들었다. 여기에 국회결의
가 과거반성이 아닌 차기 참의원선거 전략차원에서 추진됐다. 사회당은
연립여당 참여후 자위대 합헌 등으로 선회했다. 지지기반으로 부터
비난받는 가운데 다음달 선거를 제대로 치르려면 본연의 색깔을 내야한
다. 대외적으로도 명분이 서는 것이 국회결의였다. 여기에 노조 등
사회당 지지단체들이 적당한 내용은 안된다 며 확실한 결의안을 촉구했
다. 이에비해 자민당 지지기반은 일본유족회, 신사본청), 불소호념회
등 우익단체다. 선거때 활발한 집표활동을 벌여준다. "1894년
중-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부터 45년 패전까지 모두 침략전쟁으
로 다루자는 것이냐"란 자민당 주장은 사실 유족회를 의식해 논점을 흐
려놓자는 것에 불과했다. 유족회 간부를 보면 회장 하시모토(교본룡태
랑) 통산상, 부회장 고가(고하성)의원을 비롯 고문 2명과 감사-이사
각각 1명이 아예 자민당 의원이다. 이렇게 3당은 역사관과 지지기반
이 다르지만 오는 7월의 참의원선거때까지는 연립정권을 지탱해야 한다는
점, 이를 위해선 국회결의가 반드시 채택돼야 한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했고 서로 양보하다 보니 결의내용이 애매해졌다. 야당인 신진당도
결의에 관심없기는 여당과 마찬가지였다. 여당 국회결의안이 마련된 뒤
나온 신진당의 첫 반응은 "아직 신진당 결의안이 준비안됐다"는 것이
었다. 신진당 수뇌부는 당초 여당안을 받아들이기로 방침을 정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반대파가 강경하게 나왔고, 수정안
제출에 나섰다는 것이다. (침략)행위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을 것
을 맹세한다 는 내용을 추가하고, 여당안 중 역사관의 차이를 넘어서
란 내용을 삭제하자고 제안했다. 연립여당으로선 도저히 받을 수없는
요구였다. 결국 9일 여당단독으로 국회결의가 채택된뒤 "수정안 제출
을 준비하던중 전격채택됐다"(야당), "야당의 수정안을 기다렸으나 오
지않아서 "(여당)등 책임을 전가했다. 결국 국회결의 내용은 과거반성
이 아니라 변명 으로 변질됐다. 침략행위 주체인 일본 의 앞부분에
세계근대사에서 란 표현을 삽입해 주체의 비중을 희석시켰다. 그러
나 수많은 전쟁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줬다는 교훈을 살려 등
과연 어느나라 국회에서 결의가 채택되는지 알 수없었던 자민당 초안과
비교하면 진전된 내용이다. 침략적 행위 는 사회당 초안에 침략전쟁
으로 규정돼 있었으나 침략 행위 , 또다시 침략적 행위로 변질됐
다. 군일부행동 해석가능 침략전쟁은 국가, 침략행위는 정부가 아닌
군 일부의 행동으로도 해석된다. 과거행위의 객체인 한국 중국
등 국가명도 아시아 로 처리됐다. 이번 국회결의는 자민당과 사회당
은 융합할 수없는 이질적 존재란 점이 증명됐다. 또 할아버지, 아버
지에게서 의원직을 물려받은 세습 의원들이 대부분인 만큼 과거를 자
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음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미
래영향/ 빚 청산-신일본 출발기회 놓쳐/총리들 사죄 보다 후퇴 전
후세대에 짐 떠넘겨 "국제적 웃음거리" "전후50년, 젊은이들뿐
아니라 일본인전체가 지적 기초체력이 모자란 것 아닐까." 7일 마
이니치(매일)신문은 1면과 3면에 걸쳐 이런 내용의 글을 와이드특집으
로 실었다. 필자는 시사주간지 선데이마이니치 편집장을 지낸 마키(목태
랑)매일신문 편집위원. 5년반전 옴진리교에 대한 폭로기사 캠페인을 처
음 시작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교단으로부터의 조직적 협박과 피소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경고대로 아사하라 쇼코(마원창황)교주가 살인
범으로 기소된 날, 그는 옴진리교에 일찍대응을 못한 원인은 일본전체
가 지적기초체력의 결여상태에 있기때문 이라고 갈파했다. 이 글과 아
사하라의 기소 뉴스가 실린 같은 지면에, 전후50년결의안 합의 의
뉴스가 실린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도 희화적이다. 그리고 이틀후인 9일
밤 야당신진당과 일부의원들의 불참 및 반대속에 이 전후50년결의안
은 중의원에서 여당안대로 통과됐다. 이미 지적된대로 이 전후50년
결의안 은 정국혼란을 피하고 현 자민-사회연정을 유지키위한 고육지책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속에서 전쟁 사죄반성 및 부전결의 는
사죄 도 부전 도 빠진채 "놀랄만한 침략전쟁 합리화론이며 일본이 전
쟁 도화선에 불을 붙인 자각이 전혀없는 애매한 반성문"(야당)으로 변
질되고 말았다. "역사에 남는 것인 만큼 좀더 표현을 분명히하자"(세
천호희전총리)는 신진당의 시도도 여당강행통과앞에서 물거품이 됐다.
일본의 역대총리들이 인정한 침략전쟁 이 침략적 행위 로 연화되어,
총리들의 과거 사죄 발언보다 훨씬 후퇴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일본
국내에서만도 "국제적 웃음거리"(강야 명치대교수)"사죄의 말도 없고
역사에 대한 근본적 반성도 없어 2중 3중으로 부끄럽기만 한 결의"(
작가 소전실)라는 비판이 무성하다. 결의안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일
본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8일자 영국의 타임스지는 " NO 라고
는 말하게 되었어도 죄송하다 고는 말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제목의
사설로 이 결의안을 비판했고 뉴욕타임스는 "숙제안해온 학생의 반성문정
도"라고 꼬집었다. 중국에서는 신화사 통신이 "이미 역사에서 정설로
되어 있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일본은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고 비판했고 "이런 결의를 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은 이해되지 않는다"(중국일본학회)는 반응이 나왔다. "아시아 해방
전쟁" 이 결의가 앞으로 일본에 줄 해악적요소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
나치지 않다. 우선 일본은 큰 것을 하나 잃었다. 전후 50년을 맞
아 자기반성을 하고 새출발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 였으나, 이 카
드를 날려버린 것이다. 또 일본국회는 몇년후면 45년이후 출생한 전
후세대가 주축이 된다. 이 신일본 을 상징하는 사람으로 다카이치(고
시조묘)라는 61년생 여성 중의원의원이 있다. 고베대를 졸업한후 마쓰
시타(송하)정경숙을 통해 정계에 입문하고 도미, 미 의회 입법조사관
까지 지낸 소위 엘리트 다. 귀국후에는 대학교원, 정치평론가 등으로
활동하다 93년총선때 나라(내량)에서 톱당선했다. 이 다카이치는
전후50년결의 에 대해 간단히 말한다. "과거에 대해 왜 지금의 내
가 사죄와 반성을 해야하는가. 난 책임이 없다" "남경대학살은 날조였
다"는 나가노(영야무문)와 함께 사죄결의반대노선에 섰다. 가르치고 싶
은 것만 가르친 일본전후세대 사고방식의 전형이다. 마키 위원의 지적
은 비단 옴진리교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마키 위원이 터뜨린 5
년만에 하는 말 에서 옴진리교 부분은 일제 와 전쟁 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 "왜 인명을 살상하고 재산을 약탈한 일본제국주의 에 대
해 진정한 반성을 하려하지 않는가. 전쟁시 라면 무엇이든 합리화가
가능한가. 이것은 일본정치인 지식인 등이 옴진리교에 심취한 젊은이들처
럼 지적기초체력이 모자라기 때문아닌가. 일본은 50년간 미뤄온 빚을
청산치않은채 그대로 후손에게 넘겨주려 하고 있다. 5년전 경고됐던
옴진리교를 방치했다가 독가스사건으로 발전한 이후에야 일본사회는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당신 후손들이 돈만 버는데 급급해 왜
일찍 이런 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았느냐 고 물을때 당신들은 어떤
대답을 준비해놓고 있는가." *독일경우/"침략사
죄" 표명.물질보상 계속/브란트 총리 등 아우슈비츠 찾아 속죄눈물/유
럽12개국에 2천30년까지 백조원 보상 독일의 2차대전 만행에 대한
지난 50년간의 사죄표명은 분명한 반성의 뜻을 담고 있어 일본과 극
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확실한 사죄 단어를 구사하는 것은 물론
행동표현으로 이뤄져 왔다. 이번의 일본 국회결의에 맞먹는 것으로는
지난 85년5월 서독의 당시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연방의회에서 행한 종
전 40주년 연설이 자주 인용된다. 황야의 40년 이라는 제목의 이
연설에서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독일 국민을 향해 과거의 전쟁범죄에 대
해 강한 반성을 촉구, 이 연설은 전후 청산의 철학이 담긴 연설 로
평가되고 있다.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직접적인)
범죄의 유무, 노소의 차이를 묻지 말고 우리 독일 국민 전원이 과거
를 인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독일 국민이 과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
으면 안된다. 과거에 눈을 돌리지 않는 자는 결국 현재도 볼수 없기
때문이다." 2차대전 종전25주년인 지난70년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는
폴란드를 방문,"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영혼이 병든다"며 총리신분으
로 아우슈비츠수용소를 찾아 사죄의 눈물을 흘렸다. 종전50주년을 맞아
지난6일 이스라엘을 방문한 콜총리는 예루살렘의 학살기념관 을 방문
하고 지난시절 독일의 행동에 대한 사과의 뜻을 나타냈다. 과거에 대한
반성에는 독일법원도 인색하지않다. 지난해 독일헌법재판소는 "아우슈비
츠학살은 사실이 아니다"는 주장에 대해 고소가 들어오자 "아우슈비츠에
대한 망언은 언론자유의 범위를 벗어나며 그것만으로도 형사처벌을 받을수
있다"는 판결을 내려 자신들의 죄과와 반성을 분명히했다. 독일은
말로만이 아니라 이 정신을 일찍부터 실천해왔다. 전쟁 직후인 51년
7월 아데나워 당시 총리는 국회연설을 통해, "나치스시대 국내와 점령
지에서 유태인 등에게 준 고통을 독일 정부와 국민은 알고 있다"며 "
그들의 정신적 고통을 물질적으로도 보상해야 한다"고 밝혀 이것이 전후
보상의 근간이 되었다. 독일의 특징은 또 그 대상이 국가는 물론
개인에게까지 확대돼 있다. 독일은 전후 당시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음에
도 불구, 56년에 연방배상법을, 57년에는 연방반환법을 연이어 제정
했다. 연방배상법은 정치적-인종적-종교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은 피해자
와 유족 2백20만명에게 7백10억마르크를 제공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 연방반환법은 나치정권에 의해 몰수된 물건의 반환, 배상을 위해 3
0억 마르크를 제공토록 법으로 명문화하고 있다. 이어 57년에는 유
태인 대학살의 보상금으로 피해자 가족에게 4백70억달러를 제공했으며
이스라엘에 10억달러를 제공했다. 또 특별히 독일에서 추방된 유태인들
을 위해 34억 마르크를 제공했다. 서독 정부는 57년부터 64년까지
영-불-네덜란드 등 유럽 12개국과 협정을 맺고 약 9억7천만 마르
크를 지불했다. 현재 이 보상금총액은 1천억마르크를 넘어섰으며, 이
보상금은 2030년까지 계속돼 보상금총액은 약2천억마르크(약1백조원)
에 달할 전망이다. 이같은 배상부담은 국민1인당 일본의 65배에 달하
는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배상노력은 독일정부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다.독
일의 지멘스등 7개 대기업은 당시 강제노동에 동원된 1만5천여명의 노
동자에 대해 8천만마르크를 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