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치민시에서 서북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반가량 달리면 구치터
널 이란 곳이 나온다. 게릴라전을 펼치던 베트콩이 구축한 땅속기지로
외국인 관광객의 필수 코스처럼 되어있다. 지하 3층, 길이 2백50
㎞에 달하는 터널은 마치 개미굴 같아 외부인의 침입을 어렵게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베트남 종전 20주년을 맞아 지난달 29일 해방기념
행사가 열렸다. 구치지역내 4만3천여가구 가운데 전쟁중 사망자나 행
방불명된 가족을 안고있는 가구수는 무려 1만가구. 따라서 해방일이라지
만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축하행사였다. "베트남 전쟁중 베트남
미얀마 캄보디아에서 행방불명된 미군수는 고작 2천2백명입니다. 전쟁중
행방불명된 베트남인은 무려 30만명이죠." 현지인의 불만은 또 있
다. 베트남 정부는 지난 88년이후 행불된 미군수색에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종적없는 베트남인을 찾으려는 일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않고
있다는 것. 구치지구에서는 그러나 이산가족 찾기 보다는 외화벌이에 한
창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좁디좁은 구치터널 입구와 통로는 몸집
큰 미국인 관광객을 위해 크게 개조했다. 핏줄 보다는 달러가, 이념
보다는 경제가, 전쟁 보다는 생활이 앞서가는 분위기다. 30일 호치민
에서 열린 해방20주년 축하행사도 다른 해와는 달랐다. 전차나 중화기
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소총만을 휴대한 7천8백여명의 군인들이 행
진한후, 뒤따라 나타난 군중은 학생과 보통시민이었다. 베트남인의 평화
의식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자리에서 춘 탄 산
호치민 시장은 "고정관념과 증오를 버리고 미래를 위해 단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연달아 도이모이(쇄신.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구호)를 반
복했다. 미국에 대한 적대적 표현은 어디서도 등장하지 않았다. 사실
베트남 고위층들이 과거 적대국과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란
외국인들의 질문에 일관되게 내놓는 답변이 있다. "과거를 되돌아볼 시
간이 없다, 미래를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그러나 베트남인
들이 한국이 용맹을 떨친 그 전쟁을 잊었다고 판단하면 큰 오산이다.
지난달 한국을 찾았던 도 무오이 서기장은 김영삼 대통령과 회담에서
일본 프랑스 미국 등 과거 베트남을 괴롭혔던 국가들에 대한 증오심을
감추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그의 입에서 한국에 대한 증오심이 표현되지
는 않았지만, 과거를 잊지않고 있다는 암시가 분명했다고 한다. 한국의
기업들이 베트남을 호락호락 생각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