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연금생활중 서유견문 탈고/영-애-싱가포르-홍콩-일거쳐 제물
포에/1천권 자비출간 일망명후 금서취급/유학시절부터 저술준비 자료
궤짝 박물관 보존 개화의 꿈 포기안해 1885년 6월 유길준은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 피바디박물관의 에드워드 모스 관장에게 편지를 한
통 띄웠다. 갑신정변 발발 소식을 듣고 몇달을 번민하다 결국 유학을
포기,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였다."교수님의 가족들도 만나 뵐
기쁨을 갖지 못하고, 또 제가 똑똑한 지식을 얻지 못하고 미국을 등지
고 떠나게 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에 혁명이
일어났고, 희망이 없다고 들었던 날을 기억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나라를 위해 어떻게 하면 활동력을 되찾고, 악 대신에 정의를 차ㅊ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활동력 이외에 어떠한 종교도 도움이 안되며, 그 활동력이란 장래를
위한 준비에 있어서 성실한 생각을 갖는 것 뿐이라고. 그래서 제가 우
리나라로 돌아가 나라에 대해 무엇이 좋은가, 근자에 제가 결론내린 것
을 우리 국민들에게 제의하려고 합니다. 이때문에 저는 고국으로 돌아가
고 있습니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의 학업 포기와 급거 귀국
. 그의 결정의 배경에는 몇가지 해석들이 있다. 첫째는 조국의 어지러
운 현실로 인한 의욕상실이다. 둘째는 자신의 유학생활을 가능하게 해준
강력한 후견인 민영익이 칼을 맞아 더이상의 학비 지원 등 후원이 불
가능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민영익과의 의리 문제(이광린 중부대학 총
장) 등이다. 셋째는 김홍집이 궁중 내 통역관 등의 요직을 유길준에게
제의했을 가능성(한림대 유영익 교수) 등이다. 어떻든 배를 타고
뉴욕을 떠나면서도 유길준은 비록 학업은 포기했을지언정, 개화에의 꿈
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음을 이 편지는 전해주고 있다. 나라에 대해
무엇이 좋은가 를 국민들에게 제안한 것-. 그것은 유길준이 한국 개
화사에 끼친 가장 중요한 업적중 하나인 서유견문 의 편찬이었다. 이
서유견문 은 내년으로 출간된 지 꼭 1백주년이 된다. 비교적 자
유롭게 생활 유길준의 귀국 길은 조국으로 돌아오는 직항로가 아니었다
. 서유견문을 집필하기 위해 사전 준비에 나섰던듯 하다. 유길준은 영
국행 기선을 타고 미국을 출발, 런던에 들른 다음 다시 이집트의 세이
드 항을 거쳐 홍해를 통과, 싱가포르와 홍콩을 경유해 일본에 도착했다
. 미국을 떠난 지 6개월 가량의 여행 끝에 제물포(인천) 항에 도착
한 것이 12월 중순. 2년 반 전 보빙사의 일원으로 갓쓰고 도포를
입고 미국행에 올랐던 그는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필요했을 국제인이었던 이 젊
은이를 맞이한 것은 성대한 환영인파가 아니었다. 오히려 관헌들이 기다
리고 있었고 그는 체포되어 연금됐다. 남대문 밖에서 체포돼 한달 가
량 남산 아랫자락 포도청에 구금돼 있던 유길준은 다시 포도대장 한규설
의 집으로 옮겨 유폐생활을 해야 했다. 이때부터 1892년 겨울까지,
한규설의 집과 민영익의 별장인 취원장에서 유길준은 7년동안이나 연금
생활을 해야했다. 연금생활이었다고는 하지만 유길준이 한규설의 집과
취원장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규설은 유길준의
후원자였던 민영익의 절친한 친구로서, 갑신정변 후 고종의 총애를 받
아 수도 경찰을 장악하고 왕실의 비밀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실력자였다.
따라서 이런 그에게는 곁에 있으면서 자문을 해줄 유길준과 같은 국제
통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의 묵인 하에 유길준은 가끔씩 부인도 만날
수 있었고, 어윤중 신기선 오세창 이준 김학우 등 뜻맞는 친구들의
방문을 받고 개화의 진로에 대한 토론도 즐길 수 있었다. 서유견문
은 바로 이처럼 시간이 많고, 적절히 자유로운 연금생활 속에서 188
7~1889년 사이에 집필, 탈고될 수 있었다. 유길준은 사실 미국
유학시절부터 자신의 서양 견문을 토대로 책을 쓸 계획을 세우고 꼼꼼
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같은 메모들은 그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도
궤짝에 잘 넣어 운송했으나 대서양에서 동남아를 거치는 워낙 멀고 긴
여행이라 중간에 태반이 산실돼 버렸다. 결국 서유견문 은 그의 미
국 기록 중 남은 부분을 편집하고 잃어버린 부분을 보충하여 저술된 것
이었다. 그가 미국에서 가져온 궤짝은 지금도 고려대 박물관에 남아있으
며, 이번 유길준과 개화의 꿈 전시회에서도 특별전시된다. 갑오경장
때 식견 발휘 "개화란 온갖 사물을 깊이 연구하며 경영하여, 날로
새롭고 더 새로워지도록 기약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 진취적
인 기상이 웅장하여 사소한 태만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개화하는
일을 주장하고 힘써 실행하는 자는 개화의 주인이며, 개화한 자를 부러
워하여 배우기를 기뻐하고 본받기를 즐거워하는 자는 개화의 빈객이다.
또 개화한 자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면서 부득이하여 따르는 자는 개화의
노예라 할 것이다." 1895년 4월 일본 동경에서 출판된 서유견
문 의 제 14장 개화의 등급 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서유견
문 은 한국인이 쓴 최초의 근대 서양 견문록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갑오경장이나 애국계몽운동의 과
정에서 동원된 유길준의 식견과 경륜은 그의 유학생활의 무형적 결실이었
다. 반면 서유견문 은 개화사의 과정에 구체적 형태를 갖고 나타난
그의 유학생활의 가장 가시적 성과였다. 성취와 좌절, 온갖 우여곡절이
교차한 한국의 개화사가 유길준의 서유견문 마저 없었다면 지성적으로
얼마나 빈곤했을까. 1897년 6월 세일럼의 모스박사에게 서유견
문 을 한권 기증하면서 유길준은 "우리 국민들의 바깥 세상에 대한 지
식을 넓히기 위해"라고 이 책 출간 동기를 밝혔다. 유길준이 자신의
견문과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복택유길)의 서양 사정 등 기존의
서양안내서들을 종합해 저술한 서유견문 은 세계 인문지리서이면서 동시
에 서양의 정치 사회 교육제도 등을 소개한 일종의 폭넓은 정치학 교과
서였다. 특히 14장 개화의 등급 은 유길준 자신의 개화사상을 천
명하고 있는 이 책의 핵심으로 꼽힌다. "개화에는 실상개화와 허명개
화가 있다. 실상 개화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와 근본을 깊이 연구하며
이해하고 그 나라의 처지와 형편에 합당케 하는 것을 말한다. 허명 개
화라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의 좋은
사정을 보고는 부러워서든지 두려워서든지간에 앞뒤를 가릴 것 없이 덮어
놓고 시행하기만을 주장하여 재정의 소비가 적지 않으면서 실용에는 미치
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서유견문 은 자비로 1천권 출간돼 시판
되지는 않았으며, 친지들 사이에서만 주로 읽혔다. 1896년 유길준이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실세, 역적으로 몰리면서 일본에 망명하자 그나마
완전히 금서가 돼 버렸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실상개화 와 허명
개화 의 문제는 이 책이 출판된 지 1백주년, 국제화를 외치는 오늘날
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숙제가 되고 있다. 김태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