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바디 박물관 수집경위/김옥균-서광범 한영명함이 첫 소장품/보빙사
통역 로웰-주한미국공사 모건도 도움/윤웅렬-윤치호 부자도 장신구등 기
증/묄렌도르프 등 외교관에 한점한점 부탁 궁중의 화려한 예복에서부터
서민 집안의 부지깽이에 이르기까지, 피바디박물관의 한국민속품 컬렉션
은 우선 그 다양함으로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그것은 어느 특정분야
의 민속품들을 수집했다기보다는 한 시대의 생활 자체를 옮겨다 놓았다는
편이 옳다. 교통과 통신이 지금에 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열
악했던 시절, 2천5백여점이나 되는 문화재들이 다양한 경로를 거쳐 수
만㎞ 떨어진 미국 동부의 소도시에 안착되기까지의 과정은 한국문화에 대
한 뜨거운 애정을 가졌던 한 선각적 미국 지식인의 노력을 빼놓고는 생
각할 수 없다. 에드워드 실베스터 모스박사(1838~1925)-. 1
880년부터 1916년까지 피바디박물관의 2대 관장을 지낸 인물이다.
하버드대연구원 출신의 생물학자였던 모스박사는 자신의 학문적 신조였
던 진화론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수집 차 일본에 갔다가 동북아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1877년 동경대학이 처음 문을 열었
을 때 교수로 초빙돼 생물학과를 창설했으며, 요코하마에서 도쿄로 기차
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오모리(대삼)라는 곳에서 패총을 발견, 직접
발굴을 함으로써 일본에서 최초로 고고학 발굴을 한 사람이 됐다. 한국
인, 한국문화와의 접촉도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모스박사는 한번도 한
국에 온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만난 한국인이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소지품을 좀 주고가라고 할 정도
였다. 또 한국에 부임하는 서구인 외교관, 선교사 중에 지인이 있으면
반드시 민속품을 수집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이 서세동점(서세동
점)과 개화의 물결을 타고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던 이 무
렵, 한국의 문화는 모스를 통해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됐다. 흔히 알려
지지 않은 개화사의 이면이다. "피바디의 한국민속품 컬렉션들은 1백
여년전 한-미 양국 최초의 만남의 흔적입니다." 이 박물관의 동아시아
담당 수석 큐레이터 수잔 빈씨의 말이다. 이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서 김옥균 서광범 등 한국 개화파 핵심 인물들의 명함을 발견한 것은
뜻밖이었다. 세월의 흐름 탓에 약간 색이 바래긴 했지만 김옥균
서광범 의 한자이름과 영문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피바디박물
관이 최초로 수집한 한국의 민속품이 개화파 영수인 김옥균의 명함이었다
는 것은 어떤 상징적 인연마저 느끼게 한다. 모스박사가 일본 체재 경
험을 정리해 훗날 저술한 일본, 그날 그날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 "(1882년) 고베(신호)에서 온 기선에는 도쿄로 가는 몇명의
조선 사절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유쾌하고 온정이 넘쳐흐르는 사람들
이어서 나는 그들과 가깝게 지냈다. 나는 몰래 그들을 스케치하기도 했
다." 이때 모스를 만난 김옥균 서광범 탁정식 등이 모스에게 명함을
건네주었고, 그것이 놀랍게도 현재 피바디박물관에 남아있는 것이다.
두번째 수집의 계기는 같은 해 10월 개화기 무관 윤웅렬과 그의 아들
윤치호에 의해 이뤄졌다. 임오군란으로 일본에 잠시 몸을 피해있던
이들 부자는 귀국을 앞두고 모스박사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갔다. 이때
모스가 "만약 특별히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 있다면 피바디박물관을 위해
나에게 달라"고 부탁하자 윤웅렬은 후에 자기가 사용하던 물건 8점을
보내주었다. 피바디가 소장하고 있는 담뱃대,칼 등은 이때 수집한
것이었다.피바디의 한국민속품 수집 과정에서 개화기 한국에 외교고문으로
왔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모
스는 1883년 일본으로부터 귀국하는 길에 상해에서 청나라 주재 독일
영사관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던 묄렌도르프를 만났다. 그는 후에 묄렌
도르프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외교고문으로 부임하게 되자 한국유물의 수
집을 부탁했다. 이에 묄렌도르프는 자신이 수집한 당시의 한국 민속품들
을 보내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당신의 희망에 따라 한국유물을
수집하였으며, 상해에 있는 하몬드씨를 통해 보내겠습니다." 묄렌도
르프의 수집품 2백25점은 접시 냄비 숟가락 등 부엌 생활도구로부터
베개 같은 실내용품 세면도구, 장신구, 끽연구, 화폐류, 무기류 등
실로 다양했다. 이 전체 수집품은 당시 화폐가치로 1백50달러어치에
해당했다고 피바디박물관 측은 밝혔다. 모스는 1883년 박물관 연례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알고있는 한 이것들은 한국 본토로부터
밖으로 나온 첫번째 수집품이다. 무보수로 이 일을 한 묄렌도르프 경
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모스와 친분이 있던 미국인 외교관들도
모스를 도와 피바디의 한국민속품 수집에 기여했다. 그중 한사람이 보스
턴 명문가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대미 외교사절(보빙사)에 통역 겸 가
이드로 참가했던 퍼시빌 로웰이다. 그는 보빙사 대표인 민영익이 돌아
올 때 함께 한국에 와 고종을 알현하고 후에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
라 란 제목의 책을 낸 장본인이었다. 1899년 한국을 방문한 구스타
프스 고워드 박사의 수집품들에는 한점 한점 구체적인 구입액수까지 남아
있어 흥미를 끈다. 예컨대 꼼꼼하게 짠 8각 왕골방석은 5달러에 사들
였으며, 곱돌로 만들어진 전골솥도 5달러에 사들였다. 불을 붙이는 부
시는 1달러였으며, 표암 강세황의 그림을 포함한 조선후기 회화 5점은
10달러였다. 유길준과 개화의 꿈 전을 위해 이번에 서울에 온
평양감사 향연도 8폭 병풍 등은 19세기 말 외교관으로 와 알렌에
이어 주한 미국공사가 된 에드윈 모건이 수집한 것이었다. 그의 후손
들은 당시 모건이 수집한 한국 문화재들을 수십년동안 가문에 보관해 오
다가 피바디에 기증했다. 1893년 콜롬부스의 미 대륙 발견 4백주년
을 기념해 열린 시카고 만국박람회도 피바디의 한국유물 컬렉션을 늘리는
기회가 됐다. 대금 해금 옥저 등 여기에 출품됐던 한국의 상품들은
박람회가 끝난 후 피바디에 기증, 이번 전시를 위해 서울에 왔다.
피바디박물관의 한국문화재 수집은 그러나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제침
탈, 1925년 모스박사의 별세 등을 거치면서 점차 시들해져 갔다.
이 시기 피바디에서 늘어난 것이라곤 미국에 진출한 일본 야마나카 골동
품회사를 통해 구입한 어린이용 겨울 색동 두루마기, 관복, 궁중예복
등이었다. 1930년 야마나카는 모스가 피바디에 끼친 공적을 추모하여
커다란 한국 장승 한쌍을 기증했다.모스는 이국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었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일화가 그의
저서 일본, 그날 그날 에 실려있다. "(1882년) 나는 교토
에 가는 도중 두사람의 조선인과 같은 기차에 탈 수 있었다. 두 사람
은 오사카에서 내리려했다. 나는 기차표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들의 뒤를
좇았다. 눈에 띄는 흰옷이나 기묘한 말털모자와 구두,모든것이 나에겐
진기하게 보였다."그로부터 1백년이 더 지난 지금 서울의 국립박물관
에서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 시대의 생활을 고스란히 옮겨다놓고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모스의 이런 호기심과 애정이 우리에게 남겨준 선
물인지도 모른다. 김태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