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 등 궂은일 도맡다 병얻어/남몰래 곳곳에 송금 "남김없이 주고
갈래요" 7일 오전 11시쯤, 서울 중구 외환은행 약수역지점에 남루
한 차림의 할머니가 들어섰다. 할머니는 낡은 검정 헝겊가방 안에서 2
천만원짜리 자기앞수표를 한장 꺼내 온라인 송금을 부탁했다. 수신인은
경남 진주 성심인애병원. 의아해하는 은행직원들을 뒤로 하고 할머니는
말없이 은행문을 나섰다. 박상순(71)할머니. 일찍 혼자가 돼 평생
궂은 일로 장만한 집 세 채를 모두 처분해 불우한 사람들에게 주어버
리고, 자신은 시골 양로원에서 다른 노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 병까지
얻은 할머니다. 이날 은행나들이도 2년전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
박할머니는 92년 서울 가락동에 있던 15평짜리 아파트를 4천만원에
팔아 중증 나환자 7백여명이 살고있는 성심인애병원에 2천만원을 기증하
면서 "내가 죽기 전에 남은 2천만원도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국민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박할머니는 21살에 결혼했다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38살에 이혼당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박할머니는
위자료로 받은 1백50여만원을 억척스레 불려나갔다. 여관업에 잠시
손을 댔다 실패한 뒤 옷가지와 잡화를 파는 좌판상 등 험한 일을 닥치
는 대로 해냈다. 박할머니는 "젊어 재산을 모아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
을 위해 쓰겠다는 생각을 스무살 무렵 천주교 신앙을 가지면서부터 줄곧
해왔다"고 말했다. 20년 가까운 고생 끝에 박할머니는 가락동에
15평짜리 아파트 두 채와 잠실에 13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다
. 택시한번 타지 않고 모은 재산이었다. 부자할머니 소리를 들을
만하게 된 79년, 박할머니는 아무 망설임 없이 잠실아파트를 처분한
기부금을 들고 충남 논산 센뽈(성 바오로)양로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궂은 일을 자청해 해오면서 92년에는 나머지 가락동아파트도 다 처분,
성심인애병원과 천주교 수도단체인 성 프란체스코회에 각각 한 채씩 기
부했다. 센뽈양로원에서 56세로 제일 어렸던 박할머니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노인들의 뒷바라지와 병간호를 도맡아 했다. 하루에 시체
2구를 혼자서 입관시킨 때도 있었다. 이같은 과로와 무리로 박할머니의
몸은 지금 정상이 아니다. 골다공증, 허리디스크, 류머티즘에다 재작
년 겨울에는 눈위에 세번이나 넘어져 두 팔이 부러지고 뇌진탕까지 일으
켰다. 하지만 박할머니는 아직도 3천평 가까이 되는 양로원 바깥청소를
하고 있다. 박할머니는 "몸에 병이 들면서 주님이 나를 부르시려는
것 같아 더욱 서둘러 재산정리를 마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할머니
의 통장엔 아직도 4천여만원이 남아있다. "이 재산도 내가 죽은 뒤
맹인단체와 고아원 등에 기부하도록 유서공증을 해 놓았지요." 웃음 속
에 쓸쓸함 같은 것이 배인 박할머니의 말이다. 김동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