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방문 이틀째였던 지난 10일(한국시각 11일) 한승주외무장관은
미국 정부로부터 미국 의원 1명이 조만간 북한을 방문케 될 것 이
라는 내용을 전해들었다. 그 주인공은 미국 하원 군사위원장인 델럼스의
원이었다. 한장관은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막힌 대북 창구를
뚫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크게 나쁠 것이 없다 는 생각이었다고 했
다. 델럼스의원은 최근 북한을 방문했던 애커먼 미하원 아태소위위원장이
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비슷한 경로를 통해 방북 초청을 받은 것으
로 알려졌다. 미국 유력 인사를 향한 전형적인 북한식 구애였다. 미
국 방문 나흘째였던 12일 새벽, 한장관 일행은 북한 외교부 대변인의
논평을 받아들고 마지막 대화 노력의 성공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기 시
작했다. 북한은 "조-미회담을 하려는 미국측의 의사가 변함이 없음을
확인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흘 뒤 북한은 국제
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수락했다. 북한의 변화를 예고했던 장
문의 이 논평에는 남북관계에 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캐
나다 방문중이었던 15일 하루동안(한국시각 16일) 한장관은 많은 사
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북한이 IAEA의 핵 사찰을 수락한
것에 대한 축하였다. 때마침 눈까지 내리고 있는 것을 빗대 누군가는
"일이 잘되려고 하니까, 서설까지 온다"고도 했다. 북한 핵문제의
대화 노선 을 고집하면서 정부내에서 조차 소수파로 몰렸던 한장관의 입
지를 생각한다면, 전혀 이상스럽지 않은 분위기였다. 한장관 본인 역시
쑥스러워하면서도, 그리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비슷한 시각, 뉴욕
에서는 한달 보름여만에 미-북한 실무접촉이 재개됐다. 미국 대표인 허
바드 국무부 부차관보는 허종 북한 부대사에게 미-북한 3단계 고위회
담을 가지려면 남북대화라는 전제 조건을 이행하라 고 촉구했다고 한다.
미국과 만나려면 한국을 먼저 만나주고 오라 는 것이었다. 북한
핵문제가 숨가쁜 반전을 거듭하고 있던 이들 장면 어디에서도 남북 관계
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북한 핵문제가 해결 국면으로 가든, 파
국으로 치닫든 간에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저 미국의 입을 빌려야만
남북관계 개선 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역시 북한에 대한
요구는 미국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때 우리 정부는 북
한측에 워싱턴으로 가려면 서울을 거쳐라 라고 자신있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남북합의서가 채택되던 91년말 무렵에는 이런 자신감이 최고조
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약 2년여만에 우리는 자신감은 커녕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창구 조차 막혀버린 처지가 된 셈이다. IAEA 임시
-통상 사찰 수락이라는 일시적인 진전에 만족할 때는 아닌 것같다."오
타와=박두식.정치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