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태풍 맞은 거물 범털 20여명/운동-독서로 "쓸쓸한 겨울나
기"/수감자 면면따라 별들의고향 - 임정 별칭/ 높은분 면회많아
고급차량 즐비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산 18의1 서울구치소내 범털
(거물재소자를 뜻하는 은어) 사동 곁에는 부채살 모양으로 펼쳐진 6
평 가량의 격리된 공간 20여 곳 이 있다. 한 칸에 한 사람씩 들어
가는 곳. 하늘이 보이는 범털 들의 유일한 운동장이다. 맨손체조,
뜀뛰기, 공차기 . 제7동에서 수감 7개월째를 맞는 박철언의원은 운
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축에 든다. 하루 20시간 "나홀로" 안영
모전동화은행장, 이인섭전경찰청장 등은 운동보다는 양지쪽을 찾을 때가
많다. 운동파 들에게는 오가는 시간을 빼고 40분 남짓한 운동시간이
너무 짧다. 운동장 근처 둔덕에 서있던 일반재소자들이 장난삼아
화이팅 을 외친다. 요즘 서울구치소에서 거의 매일 펼쳐지는 풍경
이다. 제7동과 함께 인접한 제6동도 범털 동. 이곳은 최근에 수감
된 한화그룹 김승연회장과 배종렬전한양회장이 살고 있어 재벌동 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종인의원도 이곳에 있다.
율곡비리로 수감된 이종구전국방장관 등 5명의 전직 육-해-공군참모총장
들도 6, 7동에 흩어져 있다. 사정의 해 로 기록될 93년 한해
동안 우리나라 교정행정의 1번지 서울구치소는 사정에 한칼 맞은 이
들 거물들의 최종 기착지가 됐다. 거물들은 독방수용이 관례. 그렇다
고 일반재소자들과 생활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아침 6시 기상나팔
소리에서 저녁점호까지 일반재소자들과 다를 바 없다. 1시간 이내의
운동시간과 7분이내로 제한된 면회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20시간 가량을
혼자 지낸다. 끼니도 하루 1천1백원으로 책정된 관식을 고집하는 이
들이 많다. 서로 만날기회 적어 범털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
는 많지 않다. 특히 연고가 있는 재소자들의 경우 분리수용이 원칙.
운동장으로 이동할 때나 샤워장 의무실 등에서 만나 잠깐 안부를 묻는
정도가 고작이다. 식사는 세로 20㎝, 가로 18㎝ 크기의 개구멍
을 통해 들어온다. "떵떵거리던 거물인사들을 새 식구로 맞아 뒤치다
꺼리로 편할 날이 없습니다." 교도관생활 34년째인 김재석서울구치소장
(57)은 올해를 보내는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다. 지난 7월 부임한
김소장이 현재 관리 하는 거물급 인사는 줄잡아 20여명. 최고령자
는 67세의 안영모전동화은행장이고 최연소자는 41세의 김승연한화그룹
회장. 이들은 대부분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고 항소심에 한가닥 기대를
걸고 있다. 범털들 대부분은 3~4종류의 신문을 정-통독 하는 것으
로 전해지고 있다. 시사잡지나 소설류도 인기품목. TK선후배인 이종구
전장관과 박철언의원은 독서취향이 비슷해 책을 반드시 돌려 읽는다고 한
다. 구치소생활에 적응을 잘 하는 이들은 역시 병영생활에 젖은 군
출신들. 그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군출신의 좌장격인 이종구전국방장관
과 정용후전공군총장. 이들은 주로 군관련서적이나 성경 등을 애독한다.
김종호전해군총장은 신앙의 힘 으로 견뎌내고 있으며, 조기엽전해병대
사령관은 추석전날 가족면회 때 뇌일혈로 쓰러진 뒤 아직 제대로 회복되
지 않아 입원한 상태. 그러나 이들중 누구도 뇌물로 돈을 받았다는 기
소내용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박철언의원의 수감성적표는 우등생 이라
는게 교도관들의 평. 김종인의원은 학자출신 답게 경제학과 일어공부에
열중이며, 선이 굵어 늘 마음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슬롯머신 대부로 알려진 정덕진씨도 거물 로 통하며 담당교도관이 매일
교체되는 특별관리대상. 그래서 범털동이아닌 일반 수형자동의 독방에
수감돼있다. 한화그룹 김승연회장은 수의입은 모습이 노출되는 것을 무
척 꺼려한다. 그룹관계자들의 업무보고 외에는 가족면회도 사절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안영모전동화은행장은 고령에 담석증과 중풍증세가 있
어 최근에는 거의 병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다른 거물들과는 달리
이따금 사식으로 영양보충 을 하고 있다는 것. 구속집행정지결정으로
외부병원에 입원중인 이건개전대전고검장과 엄삼탁전병무청장은 백내장수술
을 받았다. 거물들 덕분(?)에 서울구치소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한 교도관은 "일반시국사범이 교도관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일반
재소자들 사이에 유전무죄 무전유죄 라는 말이 쑥 들어갔다"고 말했다
. 돈있고 힘센 거물들이 구속되는 것을 보고 묵묵히 수감생활에 전
념하는 분위기라는 것. 사정의 향방에 따라 서울구치소의 별칭도 변해갔
다. 율곡비리땐 별만 27개 율곡비리로 무려 27개의 별 이 수
감되자 서울구치소는 별들의 고향 이 됐고, 슬롯머신사건으로 6공
황태자 박철언의원이 수감되고 금융계황태자 이원조의원 구속설이 나돌
땐 황실 로 불렸다. 또 거물급수감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아예 임시
정부 로 불리기도 했다. 거물 면회객 도 늘어났다. 연말을 맞아
구치소 앞 주차장에는 이들이 타고온 고급승용차들이 즐비하다. 박철언의
원은 국민당의원들과 친구들의 면회가 많고 김종인의원은 정치인들은 물론
알고 지내던 이들의 면회가 잦아 그의 보좌관이 면회실에 상주, 면회
객들을 안내해야 할 정도다. 안영모씨에게는 이북출신 인사들이 많이 찾
아온다. 그러나 수감자들에게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다. 스스로를
정치범 이라고 생각하는 수감자들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세상이 바뀔
때마다 전 시대의 거물들이 줄지어 구치소로 향하는 모습이 예외없이 되
풀이 됐던 93년. 사정과 개혁의 칼바람이 휘몰아쳤던 한해가 서울구치
소 담장을 넘어 저물어가고 있다. 정권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