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자가 음악팬 찾아나서야죠"/기교적 완벽보다 자기소리 내고싶어/
건반 취향은 현대쪽 스크리아빈 심취/취미인 영화보며 영감얻어 비디
오 4천여점 모아 대담 정중헌 문화2부장 건반위의 나그네 백건
우씨(47)가 부인 윤정희씨와 함께 파리에서 귀국, 고국의 10개 도
시를 19일간 순회하는 연주 대장정에 올랐다. 백씨는 지난 16일 창
원을 시작으로 12월 4일까지 광양 춘천 안동 대구 울산 과천 광주
수원 서울을 돌며 모두 11차례 독주회를 갖는다. 그의 이번 순회음
악회는 해외에서 활동해온 중년음악가의 애향 나들이일뿐 아니라, 일급
연주자가 클래식 실연을 접하기 어려운 지역을 동서남북으로 찾아가 직접
피아노음악의 매력을 맛보인다는 점에서 음악계 안팎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작은 음악회가 오랜꿈 -지역순회연주회를 갖게된 동기부터 말
씀해 주시지요. "줄곧 초청연주회에 응하다 보니 서울 부산 등 대도
시만 찾게 되었어요. 지역팬들에게도 저의 음악을 들려드려야겠다 싶어
오래전 순회연주를 계획했습니다. 차일 피일 끌다 KBS측과 선이 닿아
계획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원래 꿈은 소읍등 작은 마을을 돌
며 교회나 학교강당을 빌려 단촐한 연주회를 갖는 것이었는데, 올해는
중도시를 우선 순회한 뒤 내년에 소도시를 한차례 더 돌려고 합니다."
-연주인으로서 개인적인 의미도 있을 것 같은데요. "10여년전
귀국 때 시골 절만 찾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의 조국과 산하를
숨쉬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갖지 못하면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힘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 앞이 막히는 느낌이 들더군요. 지금은 그
때와 달리 조급한 마음은 아니예요. 그저 우리네 땅에서 살아가는 소
박한 사람들과 만나 차분히 음악만 놓고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연주자
백건우는 숨고 음악만으로 청중과 만나고 싶습니다." -이번 연주여행
은 러시아의 명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에게서 영향받은 바 크다
고 들었습니다만 . "리히터는 80세때 러시아 전역을 2백일동안 횡
단하며 1백50여차례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마음에 드는 마을이다 싶
으면 차를 멈추고 교회-학교강당 등 장소와 청중을 가리지 않고 연주했
지요.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황혼에서 고국 러시아를 더 가까이 호흡하
려는 지오그라픽한 이유가 크지 않았나 짐작합니다만, 그때의 연주여행기
를 파리에서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번 순회연주회도 형식
이나 악기의 좋고 나쁨, 청중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소박한 감동
을 찾아나선 작은음악회 가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지방이라고 해
서 음악을 받아들이는 감성이 무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명가수 샬리아핀의 레이저디스크를 본적이 있습니다. 시골평원에 텐트를
치고 노래하는데, 연주가 끝난뒤 5천여 청중과 어울려 민요를 합창하는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어요. 샬리아핀 자신도 이때의 텐트 음악회를
일생동안 가장 훌륭한 음악체험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의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청중이 연주자를 따라오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청중의 수준이 낮기 때문에 잘 알려진
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지하지 않습니다. 대중적인 곡으로 프
로그램을 짜면 청중동원에는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연주회는 청중과
연주자가 1대 1로 만나는 자리입니다. 쉬운 곡이건 어려운 곡이건 연
주가 훌륭하고 설득력 있으면 다 전달 됩니다. 연주회가 끝난 뒤 청중
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의외로 음악상식이 깊다는 사람보다 연주장을 처음
찾았다는 사람들이 음악적인 감동을 받은 경우가 많았어요." 원시적
에너지 사랑 -화가들은 50-60대에 기량이 최고조에 달한다고 합
니다. 연주쪽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 사람마다 다르긴 합니다만
, 사라장은 10대에 꽃이 피고 알프레드 브렌델은 50대에 절정의 기
량을 발휘하고 있지요. 그러나 저는 거북이 스타일입니다. 뭐랄까,
음악은 기교가 아니라는 느낌입니다. 같은 곡이라도 몇번씩 연주해야 겨
우 음악에 접근하는 느낌입니다." - 건반위의 나그네 라는 별명처럼
상당히 낭만취향이신듯 합니다. 건반의 취향도 낭만쪽입니까. "그렇
진 않아요. 리스트 등 낭만쪽에 심취한 적도 있으나 최근에는 스크리아
빈 드뷔시 라벨 같은 현대쪽에 관심이 많아요. 특히 원시적 정열이 뿜
어나오는 스크리아빈의 광기를 사랑합니다." -현대음악에 집착하는 특
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감각적으로 현대음악 취향입니다. 현대곡을
공부하다보면 피아니스트로서 새로운 언어를 찾는 기쁨도 있고 . 그
기쁨 가운데 하나가 스크리아빈입니다. 감미로운 서정에 악마적 광기랄까
, 원시적 에너지가 덧칠된 음악이지요. 아내가 낭송녹음한 미당 화사
집 배경음악도 스크리아빈으로 꾸몄습니다." -최근 레코딩 분야에서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연주관에 변화라도 있었습니까.
"예술에 완벽은 없습니다. 완성을 기다리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요. 미숙하면 미숙한채로 나의 음악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한 시
도가 레코딩입니다. 운이 따랐는지 내는 레코드마다 과분한 평을 받았습
니다."(그의 스크리아빈 녹음은 지난해 프랑스에서 가장 탁월한 음반에
주는 누벨 아카데미 뒤 디스크 상과 피가로지 선정 베스트 레코드
상을 받았다). -불혹의 중반을 지나면서 기교 보다는 내면적 성찰
에 무게가 실린다는 평이 있는데, 스스로 연주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피아노의 톤이 언제나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에서는 언제나 아름다운 톤을 요구하지만, 그러나 인생이 아름답고 달콤
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특히 라흐마니노프 같은 낭만파 음악은 해
석과 뉘앙스가 중요하지요. 예전처럼 정확한 음, 아름다운 음 만을 고
집하지는 않습니다." -내성적 성품이신데, 평소 완벽한 연주에 집착
하는 편이십니까. "틀리지 않고 헛짚지 않는 연주를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더러 아, 이건 완벽하다 라는 느낌을 주는 연주가
있긴 하지요. 그러나 대개의 경우 감동이 없습니다. 악보대로 악센트를
주고는 있는데, 생명력이 없어요. 저는 기교적으로 완벽한 연주보다는
틀리더라도 자기소리가 있는 연주를 주장하는 편입니다." -바흐를
17세기 바로크의 박물관 에서 끄집어 내어 20세기의 감성으로 해석
한 부조니에 애착을 갖는 이유를 알듯 하군요. 파리에서의 근황은 어떻
습니까. "20세기 초반에서 2차대전때까지의 음악을 공부하고 있습니
다. 이 시기는 전통사조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서도 과거를 버리지
못하던 때이지요. 신구사조가 혼재된 채 문화예술의 각부문에서 발전적
모색이 고개를 들던 때이기도 합니다. 음악적으로는 스크리아빈 힌데미트
부조니가 이 시기를 살았습니다. 지적하신대로 부조니는 바흐를 20세
기의 눈으로 바라본 탁월한 음악가입니다. 그는 바흐의 수많은 곡을 편
곡해, 어떤 의미에서는 바흐보다 더 가깝게 바흐를 느끼게하는 인물입니
다. 이번 프로그램에도 부조니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백건우씨는 영화광으로
도 알려져 있습니다. 부인 윤정희씨와는 서로의 일 에 어떤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인지요. "서로 편안하게 느끼는 사이입니다. 서로가 서
로를 잘 이해하는 편이죠. 제경우 오히려 영화에서 음악을 배우고 영감
을 얻고 있습니다.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바흐의 음악
을 사용하는 방식, 비스콘티가 바그너와 말러를 이용하는 것을 보면 음
악인 이상입니다. 인도의 레이감독은 샹카(기타와 비슷한 인도의 악기)
를 위한 곡까지 직접 작곡했지요. 연주가 없는 날 비디오를 감상하는
것도 일과의 하나입니다. 한 4천점 모았나요 ."(곁에 앉은 윤정희씨
도 동감을 표했다. 그는 남편의 음악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춰줄 것을 원
했다.) 팝-클래식교류 긍정적 -클래식과 팝의 경계가 무너지고,
양쪽 연주자들도 한 무대서 만나는 이른바 크로스오버 가 하나의 사
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우리 클래식 연주자들 잘못이 참 많아요. 자만했던 것 같고요.
클래식은 엘리트음악이다 무조건 고귀하다 함부로 손대면 안된다
때묻으면 안된다 . 이런식으로 박물관음악을 만들다보니 요즘 청
중들이 난해하게 여기지요. 클래식도 청중이 이해하게끔 전달방법에 신경
을 쓰고 연구해야 합니다. 인기 연주자들이 팝분야를 넘나드는 것은 메
이저 레코드사의 상업성이 연출한 측면이 크지만, 궁극적으로는 클래식의
대중화에 한몫한다고 봅니다." 정리=김룡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