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3월6일 승객 등 5백43명을 태우고 벨기에 체브루게항을
떠나 영국으로 향하던 영국선적 페리여객선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
이즈호가 항구를 채 벗어나기전 제방을 들이받고 전복했다. 이 사고로
1백80여명이 사망했다. 사고후 영국정부와 의회는 사고조사팀을 구성,
사고원인규명에 들어갔다. 장장 1년6개월여가 넘는 조사끝에 사고당시
엔터프라이즈호의 화물램프가 열려 있었으며 이를 선장이 몰랐다는 등의
사고원인을 밝혀냈다. 조사결과는 다음해 국제해사기구(IMO)의 해상
인명안전협약(SOLAS)을 바뀌게 했다. 램프가 열리면 조타실에 경보
가 울리는 경보장치와 램프감시TV설치, 선박의 복원성강화, 항로의 안
내표지설치 등의 보완책이 추가된 것이다. 1989년 3월24일 알래
스카 발데즈항을 떠나 미국본토로 가던 유조선 액슨 발데즈호가 출항중
운항부주의로 좌초돼 4만2천여t의 원유를 유출시켰다. 이로인해 알래스
카만 프린스 윌리엄해협 대부분이 기름으로 뒤덮였다. 피해도 30여억달
러를 넘을 정도로 엄청났다.사고가 나자 당시 부시대통령은 국가긴급대책
팀(NRT)에 정밀조사를 지시했다. 기름유출사고에 대한 산업계와 주및
연방정부의 준비체제, 기름유출이 환경-경제-에너지-건강 등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예측분석, 사고의 교훈 등에 관해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6개월여가 넘는 정밀한 조사를 거쳐 그 결과는 백서형식으로 부시대통
령에게 보고됐다. 이는 이듬해 국가긴급방재계획(NCP) 수립과 유조선
체의 이중화(Double Bottom)등을 골자로 하는 해양오염법(O
PA) 개정에 반영됐다. 1993년 9월과 10월. 우리나라에서는
유조선 금동호의 광양만 기름유출사고와 위도 서해훼리참사가 잇따라 발생
했다. 광양만 기름유출은 남해안 경남 사천군일대까지 확산돼 피해면적만
도 여의도의 14배가 넘는 5천여㏊였다. 서해훼리사고는 22일 현재
인명피해가 2백87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고피해가 엄청난 만큼 사고
수습도 숨가쁘게 진행됐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통해 일제히 사고책임을
추궁하며 정부에 근본적인 대책을 촉구했다. 검찰과 경찰이 수사에 나서
사고관련자를 구속했다. 서해훼리호사고후에는 교통부장관과 해운항만청장
이 전격경질됐다. 전국민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진행된 이 수습과정
들은 여러기관에서 저마다의 목소리를 낼 정도로 요란한 것이었음에도 불
구, 알맹이 없는 빈수레 란 느낌이다. 사고재발을 막을 수있는 제도
적 보완이 뒤따르지 않았고 이를 차분히 준비하고 있는 기관도 없다.
대통령도 마치 인사가 만사 가 아니라 인사가 만능 이라고 생각하기
라도 하는것처럼 문책성 인사조치후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고있다. 아
마도 사고당시에는 모든 제도를 바꿀 것처럼 호들갑을 떨다가 시간이 지
나면 유야무야되는 종래의 전철을 밟고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사고까지는 같지만 그 이후는 영국이나 미국과 너무나 판이하다. 이래서
우리는 아직 선진국이 아닌가 보다. 박주영.영남취재본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