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인 헌금-아랍지원금 모아 국제시장 투자/걸프전직후 서방은예치 70
억불/권력방패 인식 미고급두뇌-컴퓨터도 활용 수십년에 걸친 이스라
엘과의 구원을 청산하고 역사적인 평화협정에 조인, 세계의 이목을 집중
시켰던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63). 1
0대 때부터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에 투신, 숱하게 사선을 넘나들며
전세계 5백여만 팔레스타인인들의 희망이자 대부로 군림해온 그가 국제
금융가의 큰 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프랑
스의 피가로 마가진지는 최근 3개면에 걸쳐 아라파트가 이끄는 PLO의
재산과 축재과정을 공개하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피가로지에 따르면 지
난 91년 걸프전이 끝났을 무렵, PLO가 전세계 금융기관및 증시에
투자 또는 예치보유하고 있던 자산은 어림잡아 70억달러를 웃돌았다.
아라파트는 이 돈을 주로 취리히나 제네바 소재 스위스은행, 뉴욕 케
미컬은행등의 비밀계좌에 예치해놓았다. 아라파트는 또 뉴욕 월가를 비
롯, 런던, 프랑크푸르트, 파리, 도쿄 등의 금융시장과 부동산에 막대
한 금액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걸프전 직전, 각국 증권시장
에서 거둬들이는 연간 수익만도 12억5천만달러에 달할 정도였다.아라파
트가 돈이 곧 권력의 열쇠라는 사실을 깨닫고 재테크 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지난 70년대 중반부터. 얼마 안되는 돈줄이었던 팔레
스타인인들의 개인헌금과 아랍산유국들의 지원금을 종자돈으로 악착스럽
게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랍국가들에 취업해있는 팔레스타인인 근로
자들의 임금 일부를 원천징수하기도 했다. 유럽과 아시아에 진출해있던
구소련 모스크바 나로드니은행 간부들을 통해 온갖 재테크 기술도 익혔다
. 77년부터는 여러 아랍은행에 출자하고 서방국가들의 금융시장에도 뛰
어들었다. 자산이 방대해지면서 효율적 투자를 위해 최신 컴퓨터를 동원
하고 미하버드대, MIT등 명문대학 출신의 고급두뇌를 활용해 국제적
머니게임을 벌였다. 이같은 아라파트의 노력으로 PLO는 80년대 초반
세계적 증권붐을 타고 대폭적인 재산증식에 성공, 돈방석 에 앉게
됐다. 아라파트는 또 사메드(SAMED)라는 독특한 팔레스타인 난민
노동단체를 결성, 난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제조업체도 운영했다. 70
년대초 레바논의 소규모 제조공장들을 발판으로 출발한 사메드는 루마니아
, 폴란드 등 동구권과 아프리카 12개국, 태국등 아시아권에 의류공장
과 각종 기계부품공장들을 소유하게 돼 한때 총자산만도 20억달러에 육
박했다.보유재산이 이쯤 이르자 돈 관리에 얽힌 뒷얘기도 적지 않다.
지난 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격했을 당시 베이루트에 있던 아라파
트는 패전 자체보다도 그곳에 예치돼있던 거금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궁리끝에 아라파트는 금괴와 현금을 스위스은행
으로 옮기기로 하고 우선 페리선 수 척을 동원, 트리폴리항을 통해
키프로스까지 특별수송작전을 벌였다. 선박 한척당 2백40만달러
를 현금으로 지불했고 선장들과 경비요원들에게는 각각 5천달러, 3
천달러씩의 웃돈을 얹어 금괴가방을 운반케 했다. 아라파트는 이렇게
천신만고끝에 모은 자금을 철저히 관리했다. 자신의 서명 없이는 한푼도
인출할 수 없게 해놓았다. PLO 공식경비 지출도 주류파 최대조직
파타의 재정담당과 군사분과 재정담당의 서명에 반드시 자신의 연서가 있
어야만 가능토록 제도화했다. 또 모든 예금계좌의 비밀번호는 자신만이
알 수 있도록 해놓아 장기집권의 보호막으로 삼았다.그러나 이같은 아
라파트의 금권을 통한 독재도 걸프전을 계기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
했다. 걸프전 당시 PLO가 이라크측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아랍국가들
이 재정지원을 중단해버린 것이다. 쿠웨이트에선 3백여명의 팔레스타인
인 근로자들이 추방되기도 했다. 견제세력과의 반목을 돈 으로 메우어
오던 아라파트로서는 커다란 치명타가 아닐 수 없었다. 이스라엘과의
중동평화협상에 응할 당시 아라파트 계좌의 PLO 자금은 과거 70억
달러에서 25억달러로 격감했다는 얘기도 있다. 때문에 적지않은 PL
O전문가들은 재정에 어려움을 겪게된 아라파트가 거센 반대파의 도전에
직면하자 중동평화협상으로 일대 도박을 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윤희
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