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맞으며 수업 19세에 이미 명성/힘있는 너름새 우리소리 일깨워
14일 타계한 박귀희여사는 소리와 가야금에 평생을 바친 국악계의 거
목이었다. 그는 60여년의 국악인생을 통해 가야금 병창의 맥을 이으며
우리소리와 가락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일깨워줬다. 1921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박여사는 보통학교 시절부터 국악 가락만 나오면 가던
걸음을 멈출 정도로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소녀였다. 결국 박여사는 보
통학교 졸업후 "국악을 하면 기생이 된다"는 아버지의 만류도 뿌리치고
당시 명창 이화중선이 이끄는 대동가극단에 들어갔다. 16세때에는 서
편제 소리의 박동실선생, 동편제 소리의 류성준선생등 기라성 같은 스승
의 문하에서 판소리 다섯마당을 익혔고, 강태홍 오태석 두 선생으로부터
가야금도 배웠다. 그는 스승들에게 종아리가 붓도록 회초리를 맞아가
며 배웠고, 깊은 산속에 백일씩 틀어박혀 득음을 향한 고통스런 수업
도 쌓았다. 남다른 정진으로 그는 19세쯤부터는 국악계의 스타로 발
돋움했다. 처음엔 가야금 병창보다는 판소리로 이름을 날렸다. 한양창극
단에 들어간 이래 20여년간 판소리에서 1급의 자리를 지켰고 뒤늦게
그의 숨은 가야금 솜씨도 인정받아 69년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로 지
정받았다. 선이 굵고도 열정적인 소리와 뛰어난 너름새(연기)가 장기인
박여사의 가야금 병창은 72년 뮌헨올림픽과 77년 미국순회공연등을
통해 외국에도 명성이 알려졌을 정도다. "국악을 하는 사람들이 학문
적으로 제대로 배우지 못한게 철천지 한"이라고 입버릇처럼 되뇌던 박여
사는 후진양성과 가야금 병창의 악보화에 힘을 쏟았다. 55년에는 공연
활동으로 모은 돈을 털어 김소희 박록주 씨등과 함께 국악민속예술학
원을 설립했고, 이 학교는 60년 국악예술고등학교로 발전해 국립국악고
교와 함께 국악의 양대교육기관이 됐다. 그는 40여년간 경영해 오던
풍류 가인들의 사랑방 운당여관도 89년 8월 국악예고 이전비용으
로 재단에 선뜻 내놓아 국악 꿈나무 양성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를 또한번 보여줬다.안숙선 김성녀 강정숙 정예진 정한희 윤소인 조남인
등 이수자 7명을 비롯하여 박여사의 문하에서 수업을 쌓은 30여명의
문하생들은 모두 국악계의 중견으로 맹활약중이다. 대학 강의와 국악연구
소 등에서 양성한 제자들을 헤아리면 3백명이 넘는다. 만년의 박여사
는 "국악대학을 설립해 좀더 체계적이고 깊이있게 국악의 맥을 잇고 싶
다"는 말을 자주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김명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