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청 으로 전락한 KIST/독립채산 붕괴 정부에 경비인상 로비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자,국력의 척도입니다."
69년 10월23일 오후 2시 우렁찬 해군악대의 행진곡에 이어 등
단한 박정희대통령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축사를 읽어내려갔다. 홍릉 한
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준공식. 초대소장 최형섭박사가 외국에서 불
러 모은 과학자들은 숨을 죽이며 축사를 가슴에 새겼다. 69년 "의
욕적 출발" 미국 바텔연구소를 비롯,5개 선진국의 연구소를 본떠 세
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연구소 키스트. 1인당 GNP 1백31달러,
수출고 2억5천만달러의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이었지만 유치과학자들에
게는 파격적인 대우가 주어졌다. 서울대 교수 봉급의 3배,47평 아파
트,승용차 출-퇴근 . 키스트는 연구원들의 꿈이었다. 열일곱해가 지
난 1986년. "연구실 책상에는 유학준비를 위한 토플(TOEFL)
시험책자,빵부스러기와 소형 라디오,각종 주간지가 구겨져 있다. 한때
과학원에 흡수 신문을 읽고나면 컴퓨터게임으로 연구원의 일과가 시작
된다 . 이상희 당시 국회 상공위원장이 저자로 돼 있지만 반란연구원
들 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키스트비록 은 허물어지는 한국 과학기술의
전진기지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반란연구원이란 89년 12월 키
스트의 신선놀음같은 연구 에 반기를 들고 뛰쳐나온 젊은 공학박사 2
2명이다. 이어지는 통렬한 비판. "실패해도 부담 없고,하나마나한
제목을 골라 연구하고,연구보고서에는 외국 교과서가 번역도 않고 통째로
복사되고 ." 그들은 연구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독립채산제,연구원의
활발한 교체,외풍없는 인사권이란 계명을 가지고 생산기술연구원 을
세웠다. 그 생기원에서도 그들의 이상이 싹을 키우지 못하고 있는 건
별개이다. 90년 2월6일 스무살의 성년 키스트. 긴급안건을 다루기
위해 인사위원회가 부랴부랴 소집됐다. 환경공학연구실 책임자의 연구표
절 사건. 2년동안 수행한 한강 주운 타당성 조사사업 환경조사 보
고서를 내면서,서울시립대 연구팀이 그전에 서울시에 제출했던 서울시
수질오염 감축대책 보고서 를 양해도 없이 상당부분 그대로 베낀 것이다
. 인사위가 견책처분을 내리려 했으나 문제의 책임자는 사직했다. 남
의것 베낀 보고서 24살 된 93년의 키스트. 1년전 자랑스럽게 키
스트에 들어온 연구원은 프로젝트 구상을 위해 전자소재 관련 연구보고서
를 훑어보았다. 1백여쪽 중에 다른 책에서 베낀 내용이 반을 넘었다
. 실험을 거치지 않은 엉뚱한 결론도 튀어나왔다. 연구원은 자신이 입
사하던 해에만도 왜 53명의 선배들이 키스트를 버렸는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70년대엔 주역,90년대엔 엑스트라. 곤두박질의 역사는
어지러운 통-폐합의 궤적과 겹친다. 서슬이 퍼렇던 1980년,키스트
는 교육을 위주로 하던 한국과학원(KAIS)이 됐다. 설립자가 박정희
에서 전두환으로 바뀌었고 육사출신의 이정오 당시 카이스 교수가 새 원
장으로 왔다. 89년 다시 분리돼나온 키스트 사람들은 지금도 통-폐합
을 점령 이라고 부른다. 키스트는 출범 당시 연구소 사상 처음 독립
채산제를 도입했다. 정부는 최소한의 유지비(15%)만을 대주고 각 연
구실 운영비는 기업의 수탁과제를 따다 채우는 의욕적인 시도였다. 그러
던게 정부지원이 15%에서 슬금슬금 90년 85%까지 늘어나 어느덧
운영비와 연구비를 정부에 의존하는 체제가 돼버렸다. 이전에는 연구실
스스로 기업수탁연구비에서 인건비를 조달했지만 81년부터는 정부가 특정
연구과제를 주면서 인건비를 별도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독립채산제의 폐
지는 키스트를 연구소에서 관청 으로 바꾸어 버렸다. 고민과 관심사는
어떤 연구로 기업의 과제를 받을까 에서 올해는 몇%나 연구비가
오를까 로 변했다. 연구비를 주는 과기처만 바라보고 로비를 벌여야 했
다. 평가방식도 알게 모르게 달라져 갔다. 실용적인 기술개발연구보다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탁상공론식의 논문을 양산하는 연구원이 행세했다.
중병을 앓고 난 환자 교통사고가 난 스포츠 스타 . 연구원들이
주저없이 달아놓은 이 부끄러운 키스트의 문패를 떼어다가 차라리 한국
과학기술연구원 앞에 걸어놓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