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8월27일 조간14면 기사(문화)

600년 서울

최초의 발전소(発電所)

경복궁 향원정(香遠亭)에…고장잦아 「건달불」별명

1887년 초봄, 구경 좋아하는 한성의 사녀(士女)들은 지금 소격동(昭格洞)인 관화방(観火坊)으로 몰려들었다. 궁에 켜졌다는 「물불」을 보려고 밀어닥친 것이었다. 경복궁 향원정(香遠亭)의 못물을 먹고 켜진 불이 건청궁(乾淸宮) 처마 밑에 벌겋게 켜졌다 해서 「물불(수화·水火)」이라고 이름 지어졌고, 그것은 또 묘한 불이라는 뜻으로 「묘화(妙火)」라고 불렸다.

지금은 작고하고 없는 운현궁의 안상궁은 그의 경복궁 출사중에 일어났던 이 한국 최초의 전등 설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남기고 있다.

『계미년으로 생각된다(안상궁의 착각으로, 병술년이 맞음). 지금의 향원정 다리와 그 못가에 있던 샘터의 가운데 목에 서양식 집이 서고 커다란 쇠물통이 3개쯤 높이 올려져 있었다. 그 서양식 가옥안에는 갖가지 기계가 비치되어 있고, 그 기계들은 서양사람이 관리했다. 궁내의 너른 대청과 마당에는 커다란 등롱같은 것을 달고, 서양사람이 기계를 조작하면 멀리서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요란스럽게 나면서 못물을 빨아올렸고, 한쪽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뜨거운 물이 못으로 흘러나오곤 했다.

이러길 한참 하면 그 등롱 같은 데에 환한 불이 켜지므로 넋을 잃고 도망쳐 나와 야음을 이용하여 숨어서 바라보곤 했다.

지금 같으면, 삼척동자라도 그것이 전기라는 것을 모를 리 없지만, 그때에는 전현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라, 정말 괴물이라 하여 각 별궁에서도 온갖 구실을 붙여 이 본궁의 괴물을 구경하러 모여들곤 하였다.

그때에는 아무도 그것을 전등이라 부르질 않았으며 그냥 「괴물」로만 통하였고, 이것이 켜 있는 동안은 밤이나 낮이나 끊임없이 귀따가운 소음이 들려와 짜증을 부리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에는 고장이 잦았고, 그럴 때마다 전기가 나갔으므로 촛대는 없애지 않고 늘 상비해 놓고 썼다.

고장이 한번 나면 비용이 어찌나 크게들던지 그 당시 건청궁 주사였던 이수영씨의 고충은 이루다 말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전등은 두 가지의 불운에 의해 그해 3월8일에 결국 꺼져버리고 말았다.

전등을 몰아낸 첫째 이유는 도참적 사고방식에 의해서였다. 증기기관의 뜨거운 물이 향원정 못에 흘러듦으로써 그 못속의 고기들이 죽어버린 것이다. 증어(蒸魚)가 망국(亡国)의 흉조임은 옛사기에도 많이 나와 있고, 이 도참설을 본격적으로 내세우는 벼슬아치들이 당시 조정에 많이 있었던 것이다. 또 이궁중 증어에 대한 풍문은 항간에 나돌아 민심을 어지럽게 했으며, 개화를 헐뜯는 보수세력의 더없는 무기로 이용되었다.

둘째 이유는, 이 증기기관의 미국인 기사 맥케이의 피살사건이다. 맥케이는 호신용으로 항상 6연발의 권총을 가지고 다녔다. 어느날 맥케이 밑에서 일하던 한국인 조수가 그 권총을 만지다가 오발을 하여 맥케이가 맞아 죽은 것이다.

한국인 조수가 개화를 싫어하는 보수파의 사주를 받고 고의로 죽였다는 오해를 받았으나, 맥케이가 죽으면서 한 증언 때문에 형벌을 모면할 수 있었다.

더욱이 밤새껏 터덜거리는 발전실의 소음을 고종이 싫어한 데다가 고장이 너무 잦아, 당시 건청궁 주사였던 이수영의 고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한말의 멋쟁이요, 양춤의 도입자이기도 한 이하영(李夏榮)의 아우인 이수영은 잦은 수선비, 석탄값, 외국인 급료 등으로 막대한 경비가 소모되었기때문에 유지할 수 없다고 불평을 자주 했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하여 이 『물불」은 어느 사이에 제멋대로 켜졌다 꺼졌다 한다하여 「건달불」이라는 별명을 얻고 사라져 갔던것이다.

[출처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2173519910827m1141&set_date=19910827&page_no=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