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서울
재동 백송(白松)집 (조대비(趙大妃) 친정)
판서(判書) 대물림 풍양조씨(趙氏) 세도-영화 누린 곳
백송(백송(白松))은 그것을 가꾼 이의 영화에 비례해서 그 껍데기색이 하얘졌다 덜해졌다 한다는 속전이 있다.
10년에 겨우 50㎝(㎝)밖에 자라지 않는다는 이 백송은 현재 서울에 네 그루, 지방에 네 그루 모두 여덟 그루밖에 없다. 이 모두가 중국 사신들이나 중국을 다녀온 조정의 사신들이 묘목을 가져다 심은 것이다.
이를테면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뒷산에 있는 백송은 순조(순조(純祖)) 6년 추사 김정희가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갔을 때 갖고 돌아와 조묘(조묘(祖墓)) 곁에 심은 것이다. 보은군 어암리 뒷산에 있는 백송은 1백 90여년 전 김탁계가 역시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것이다. 고양군 송포면에 있는 백송은 선조 때 조선에 온 중국 사신이 두 그루 가져온 것을 그곳에 사는 유하겸이 얻어 그중 한 그루를 심은 것이다.
여덟 그루 중에 가장 굵고 큰 백송은 서울 통의동 35의 3번지에 있는 것으로 높이 16m 밑둥둘레 5m이며, 수령은 6백년이고 가지는 여섯 갈래로 나있다. 그런데 가장 아름답고, 밑둥빛깔이 하얀백송은 재동35번지 전 창덕여고의 뜰에 서있는 것이다. 고사(고사(枯死))위기를 맞아 화제에 올랐던 바로 그 백송이다. 가꾼이의 영화에 비례해서 백송이 더욱 하얗다면 이 재동백송은 그 얼마만한 영화를 보아왔기에 저토록 하얗단 말인가.
이 백송은 영조 때 판서를 아홉 번이나 했다는 풍양조씨(풍양조씨(豊壤趙氏)) 세도의 우두머리 조상경이 이 터에서 누린 영화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의 아들이 이조판서인 조돈, 조카는 자기가 옳다고 하는 일에 끝까지 고집하므로 「조고집」이라는 속명을 남긴 이조판서 조엄이다. 조엄은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가 감저(감저(甘藷))씨를 가져와 제주도에 심어 보급한 고구마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제주도나 남해안 지방에서는 고구마를 「조저」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조씨가 가져온 감자(저(藷))란 뜻으로 민생에 끼친 그의 고마움을 기리는 이름이다.
엄의 아들은 이조판서를 지낸 조진관이다. 진관의 아들은 대원군의 풍운과 정치적 맥락을 잇는 조대비의 아버지인 조만영(풍은대원군)과 헌종(헌종(憲宗)) 7년부터 철종(철종(哲宗))1년까지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던 조인영이다.
재동백송이 가장 하얗게 되었던 때는 조대비를 후광으로 하여 안동김씨 세도에 버금가게 쟁쟁했던 헌종-종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백송이 더욱 흰빛을 더하기 시작한 것은 철종이 병상에서 임종을 기다릴 때였다.
계해년인 1863년 이하응(흥선대원군)은 그의 심복인 이호준(이호준(李鎬俊))을 야밤에 불러들였다. 이하응이 이호준을 알게된 것은 그가 제관이 되어 동구릉을 순배할 때였다.
이호준은 능참봉으로 있을 때였고, 이하응이 안동김씨 김병국의 배려로 사복시제조로 있을 때 이호준을 불러 사복시주부로 발탁하고 있다.
이하응은 이호준의 사위가 조만영의 손자인 조성하(조성하(趙成夏))임을 알고 있었고, 조성하로 하여금 친고모인 조대비와 내통, 자기 아들(고종)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는 음모를 꾸몄다.
이호준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이 재동백송이 지켜보는 조성하의 사랑을 찾아가 음모를 진행시킨다.
결국 이 음모가 성공함으로써 왕권이 회복되고 안동김씨 세도에 종지부를 찍는다. 한편 조성하와 그의 사촌 병조판서 조영하(조영하(趙寧夏)) 등 풍양조씨 세도가 중흥하고 이호준의 우봉이씨(우봉이씨(牛峰李氏))인맥이 상승하게 된 것이다. 세도정치에서 왕권복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호준은 그 대가로 전라감사로 영전하고 그의 양자인 이완용(이완용(李完用))과 서자인 이윤용은 그 후광으로 순탄하게 벼슬길에 올라 대신 반열에 오르고 끝내 총리 대신으로서 이완용은 나라까지 팔아먹게 된다. 정치책략은 그래서 무상하다.
살아서 영화를 빛내줄 소유주가 없어져 스스로의 운명이 다했음을 알고 시들어간 재동의 백송이었을까.
[출처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