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차 떠난 뒤 손 흔드는 것 같은 심경이라고 할까요. 올해 칸 영화제 주요 수상작이 지난 주말 발표됐지요. 올해 경쟁 부문 초청작은 21편이었는데, 이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14편을 본 것 같습니다. 비경쟁 부문 초청작과 한국 영화들을 합치면 올해 영화제 기간 동안 대략 스무 편을 본 것 같네요. 언제나 사람 마음 똑같지만, 역시 본 작품보다는 놓친 작품에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지난주에 이어서 칸 영화제 기간 동안 현지에서 보았던 경쟁 부문 진출작들에 대한 간단한 후기를 정리했습니다. 말 그대로 뒤늦은 ‘후기(後記)’가 되고 말았네요.
8. ‘헤어질 결심’
차포 떼고 두는 장기 같다고 할까. 올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인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는 핏빛 흥건한 폭력도, 짙은 성애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칸 상영 다음날 기자회견에서도 박 감독은 “다른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으면 이런 질문을 안 했을 텐데, (폭력과 성애가) 있으면 ‘왜 있느냐’고 하고, 반대로 없으면 ‘왜 없느냐’고 질문하시니”라고 유머 섞인 푸념을 해서 전 세계 취재진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영화는 누아르와 로맨스의 결합에 가깝다. 전반의 누아르와 후반의 로맨스가 맞물리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구조다. 그 둘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면 물론 사랑일 것이다. 누아르에서 남성은 언제나 치명적 여인에게 이용당하지만, 반대로 로맨스에서는 여성이 사랑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다. 둘의 결합을 통해서 영화는 온전하게 하나가 된다.
감독 자신이 스웨덴 범죄 소설과 영국 고전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지만, 후반부에서 두드러지는 작품이 있다면 단연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일 것이다. 안개라는 배경, 등장 인물들의 대사, 무엇보다 김수용 감독의 1967년 영화 ‘안개’의 주제가 선율을 통해서 소설에 대한 오마주를 강하게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작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9. ‘토리와 로키타(Tori et Lokita)’
“다르덴 형제의 영화처럼 날 것 같은 장소와 현실성,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건 아니지만.” 박찬욱 감독의 말처럼 다르덴 형제는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으로 극 영화를 다루는 벨기에 출신 감독들이다. 올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인 ‘토리와 로키타’ 역시 영화 제목인 아프리카 출신 남매의 비극적 운명을 다루고 있다. 인종과 나이의 이중적 약자인 이들 남매는 천신만고 끝에 벨기에에 도착했지만, 추방 위기 속에서 또 다시 헤어질 운명에 처하고 만다.
흔들리는 카메라를 들고서 좀처럼 화면을 끊는 법 없이 피사체에 바짝 다가가는 이들 형제의 방법론은 이번 영화에서도 변함없다. 험한 세상에 남겨진 두 남매의 처지를 통해서 오늘날 유럽의 화두인 난민 문제에 대해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수상 여부와는 별개로 이들 형제의 최고작은 아닐 것 같다는 유보적 판단은 남는다.
10. ‘스타스 앳 눈(Stars at Noon)’
올해 베를린 국제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프랑스 여성 감독 클레르 드니의 신작. 미국 소설가 데니스 존슨(1949~2017)의 동명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1984년 니카라과 반군 혁명 이후 영국 사업가와 미국 여성 저널리스트의 탈출 과정을 그렸다. 흥미로운 건 남녀 주인공의 정체성이 모두 지극히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석유 회사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영국 사업가의 호텔 방에서는 권총이 발견되고, 미국 잡지에 중남미 상황을 보도하려던 여성 저널리스트는 여권마저 압수당한 채 사실상 거리의 여인으로 전락한다. 이 때문에 첩보물과 하드보일드, 로맨스가 뒤섞인 듯한 재미가 있다.
영화는 인물이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채 대략적인 정보만 제공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을 보여준다. 마스크를 쓴 초반 장면을 통해서도 시기적 모호성을 증폭시킨다. 흡사 ‘보니 앤 클라이드’나 ‘카사블랑카’를 중남미의 정치 상황에 대입한 것 같지만, 별다른 반전이나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 채 늘어지는 듯한 상황 때문에 초반의 흥미는 조금씩 반감되고 만다. 입상 여부와는 관계 없이 스타일의 과잉과 철학의 빈곤이라는 의구심을 지우기 힘든 경우일 것 같다. 그마저 또 하나의 취향이자 스타일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11. ‘브로커’
칸에서 ‘브로커’를 연이틀 보았다. 실은 의문이 남았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는 언제나 두 가지 열망이 존재한다. 사회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정신이 하나라면, 일도양단의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넉넉한 여백과 여운을 남겨 놓는 극 영화의 방법론이 또 하나다. 이 둘은 아름답게 공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색한 동거가 되기도 한다. ‘브로커’는 전자일까 후자일까. 첫 상영이 끝난 뒤에도 이 질문이 좀처럼 뇌리를 떠나질 않았다.
영화는 키울 수 없는 아이를 맡기고 가는 ‘베이비 박스’의 실화에서 출발한다.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는 대신에 입양을 몰래 주선하는 주인공 역을 송강호와 강동원이 맡았다. 그래서 제목도 ‘브로커’다. 영화 제목이 암시하듯이 좋은 양부모를 찾아주려는 선의와 소개비를 챙기려는 악의가 이들의 내면에는 모두 존재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아이들의 “큐피드”라고 부르지만, 경찰의 입장에서는 아동 유괴이자 인신 매매 행위가 된다.
낳은 것과 기르는 것의 관계에 대한 성찰에서는 감독의 2013년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핏줄로 이어지지 않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유사 가족을 이루는 설정에서는 2018년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이 떠오른다. 상영 다음날 공식 기자회견에서 고레에다 감독이 세 작품에 대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감독의 작품 세계를 이미 알고 있는 관객 입장에서는 자칫 참신함보다는 기시감이 앞설 수도 있다. 하지만 선의와 악의, 가해와 피해, 원망과 용서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후반부 감동이 이를 상쇄한다. 결국 모든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고레에다의 영화는 어쩌면 한 가지 주제의 다채로운 변주일지도 모른다.
12. ‘레일라스 브러더스(Leila’s Brothers)’
1989년 이란 감독 사에드 루스타이의 신작. 제목 그대로 여성 주인공 레일라의 가족 이야기를 담았다. 레일라의 아버지 에스마일은 가문의 최고 웃어른으로 대접받고 싶은 것이 평생의 소원.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문의 결혼 행사에서 거금을 쾌척해야 한다. 하지만 정작 그의 아들 넷은 모두 실업자 신세로 전락한 상태. 엄숙한 가문 행사와 아들의 직장 폐쇄에 따른 격렬한 노사 분규를 교차시키는 초반부터 체면과 실속, 전통과 현실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한 편으로는 평판과 위신, 가문의 명예가 중요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세속적 고민을 해야 하는 영화의 풍경이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남성의 허세와 여성의 억척스러운 생활력을 대비시킨 장면들도 묘한 공감을 자아낸다. 대사와 상황의 반복이 적지 않아서 전반적으로는 한 편의 장편 영화보다는 연속극을 합친 듯한 느낌이 강하다. 상영 시간도 2시간 40분으로 다소 길지만, 사회 비판적 드라마와 코믹한 풍속극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어서 지루한 느낌은 적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아스가르 파르하디 이후의 이란 영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 종교가 일상을 지배하는 나라로만 이란을 바라보기 쉽지만 실은 세상사 고민은 엇비슷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13. ‘보이 프럼 헤븐(Boy from Heaven)’
아담은 가난한 어촌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루하루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이집트 청년. 어느날 이집트 수니파의 최고 교육 기관으로 꼽히는 알아즈하르대의 합격 통지서를 받는다. 실제로 명망 있는 이슬람 학자 가운데 선출되는 이 학교 총장은 ‘대(大)이맘’으로 불리며 이슬람 사회의 절대적 존경을 받는다.
영화에서 아담은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하지만, 입학 직후 학교 총장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후임자 선출 과정에서 결국 아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 당국과 급진 이슬람 단체 사이에서 스파이 노릇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보이 프럼 헤븐’은 이집트계 스웨덴 감독인 타릭 살레의 신작. 세속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가 충돌하는 이집트의 현실을 영화의 재료로 삼았다. 종교물과 첩보물을 섞은 듯한 재미 때문에 칸 영화제 공개 직후 외신들의 반응도 호평이 많았다. 민감한 소재를 다룬 점은 영화의 장점이지만, 거꾸로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영화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인 종교적 갈등을 더 깊숙하게 파고들기보다는 첩보물의 소재로만 활용하는 듯한 아쉬움은 있다.
14. ‘미래의 범죄(Crime of the Future)’
‘플라이’와 ‘크래쉬’의 캐나다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미래의 범죄’는 올해 칸 영화제에서도 찬반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작품이다. 크로넨버그는 레아 세두와 크리스틴 스튜어트 등 화려한 출연진의 지원 속에서 칸에 입성했다. ‘첫 장면부터 퇴장하는 관객이 있을 것’이라는 외신 리뷰처럼 차마 옮겨적기 힘든 괴이한 상상력이 초반부터 펼쳐진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신체 장기의 해부와 교체 등 크로넨버그의 장기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온몸에 귀가 달린 사람처럼 감독의 작품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장면들도 적지 않다. 그의 선구적 문제 의식은 지난해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었던 ‘티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다만 충격적 묘사와 철학적 대사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걸작인지에 대해서는 다분히 의구심이 남는다. 영화는 철학이나 미학 강의와 동의어가 아니고 고통과 쾌락, 죽음과 생명에 대한 고담준론이 완성도를 보증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