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시네마 클래식’은 영화와 음악계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는 ‘이야기 사랑방’입니다. 영화·미디어·음악 담당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취재 뒷이야기와 걸작 리스트 등을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한국 피아노의 대모’ 신수정 선생님의 특별한 생일 이야기입니다.
기사를 쓰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피아니스트 신수정 선생님의 지난 4월 29일 음악회가 그런 경우였지요.
이날 신 선생님의 음악회에 초대 받은 피아니스트 이경숙(77) 선생님은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차례 무대에 서는 왕성한 현역입니다. 그날도 그런 경우였지요. 예술의전당의 오전 음악회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 2~3악장을 협연한 데 이어서, 같은 날 저녁에는 서초동 모차르트홀에서 신수정 선생님과 함께 모차르트의 ‘네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했습니다. 객석에 앉아 계시던 이경숙 선생님은 마지막 앙코르에 ‘깜짝 손님’으로 무대에 올라오면서 “언니가 부르는데 내가 와야지”라며 웃었지요.
이에 앞서 ‘바이올린의 여제’ 정경화(74)도 신 선생님과 함께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K.547)로 호흡을 맞췄습니다. 바이올린 활끝으로 신 선생님의 피아노 악보를 대신 넘겨주려다가 잘 넘어가지 않자 특유의 너털웃음을 짓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이렇듯 현(絃)과 건반의 전설들이 총출동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신 선생님의 여든 살 생일이었지요.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 조성진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신 선생님은 이날 오스트리아식 전통 의상을 입고 자축 무대에서 이들과 협연했습니다.
유년 시절 이들은 신수정 선생님의 동료이자 라이벌이기도 했지요. 6·25전쟁 중이었던 1952년 11월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서 열렸던 제1회 이화경향음악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신수정은 2위, 이경숙은 4위에 올랐습니다. 전쟁통의 부산 국제시장에서 어머니가 사주신 빨간 치마를 입고서 초등생 신수정이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곡이 이날 정경화와 함께 들려준 모차르트의 소나타 2악장이었습니다. 이날은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이중주로 들려줬지만, 70년 전 콩쿠르 때는 피아노 편곡 버전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신 선생님은 “당시 연주를 마치고 내려왔을 때 제 손을 붙잡고 호호 불어준 분이 정경화의 어머니인 고(故) 이원숙 여사였다”고 말했지요. 이날 신 선생님은 1950년 고향 청주에서 열렸던 첫 음악회 당시 연주했던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도 함께 들려줬습니다.
이제야 고백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연주회 당일에도 정경화와 이경숙 선생님까지 화려한 출연자 명단에 그저 감탄만 했을 뿐 신 선생님의 생신이라는 사실은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연주회가 끝나고 기사 작성을 위해서 부랴부랴 빠진 팩트 체크에 들어가고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전화를 드렸지요. 실은 신 선생님께서도 연주회 내내 생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관객 200여 명 대부분도 모르고 지나쳤지요. 선생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지난해부터 신 선생님이 진행하는 ‘이야기가 있는 음악회’에는 이렇듯 한국 음악사의 중요한 장면들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지난해 12월에는 1971년 자신이 직접 한국 초연했던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을 다시 연주했지요. 5월 22일에도 바리톤 박흥우와 함께 슈만의 가곡 ‘시인의 사랑’을 들려줄 계획입니다. 신 선생님은 “언제까지 할 수 있으려나 몰라”라고 했지만, 팔순을 보내는 특별한 방법을 한국 음악계에 보여주는 듯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