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시네마 클래식’은 영화와 음악계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는 ‘이야기 사랑방’입니다. 영화·미디어·음악 담당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취재 뒷이야기와 걸작 리스트 등을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최근 방한한 폴란드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연주회 취재기입니다.
“작곡가 시마노프스키는 1882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습니다.”
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폴란드 출신 명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65)의 내한 공연. 예고된 연주를 모두 마친 연주자가 마지막 앙코르를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카롤 시마노프스키(1882~1937)는 지메르만의 고국인 폴란드 작곡가이지만, 출생지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인 체르카시주(州)라는 걸 상기시킨 것이다. 윤동주(1917~1945) 시인이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의 ‘국민 시인’인 것과도 비슷한 이치다. 체르카시는 지금도 연일 공습 경보가 울리는 곳이다. 지메르만은 딱 한 마디를 한 뒤 어떤 부가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에 침공 당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 의사를 넌지시 표명한 셈이 됐다.
197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 출신의 지메르만은 40년 뒤 같은 대회에서 우승한 조성진의 ‘음악적 멘토’로도 잘 알려져 있다. 평소 그는 공연 도중에 즐겨 말하거나 인터뷰에 쉽게 응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발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1년 9·11 사태 이후에는 미국의 강경한 대외 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적도 있다.
지메르만은 공연의 녹음·녹화·촬영을 일절 금지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까칠한 피아니스트’로도 불린다. 지난 2003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독주회 당시에는 무대에 설치된 마이크를 보고 불만을 표시하는 바람에 공연이 지연된 적도 있다. 올해 내한 공연의 출발점이었던 지난 25일 대구콘서트하우스 공연 당시에는 시작 전부터 안내원들의 당부가 쏟아졌다.
“안내 책자나 소리 나는 물건들은 모두 바닥에 내려놓아 주세요.” “공연 중 움직임도 조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휴대 전화는 꺼주시고, 녹음 녹화와 사진 촬영도 안 됩니다.” 공연 중에는 덜 움직여달라는 말은 난생 처음 듣는 것만 같았다. 안내원들의 ‘폭풍 잔소리’ 덕분일까. 이날 연주회 내내 안내 책자가 두어 차례 떨어지는 소리를 낸 것 외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흡사 고요한 ‘피아노의 신전(神殿)’에 온 듯했다.
반면 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연주회에서는 거듭된 당부에도 불구하고 결국 공연 도중에 휴대전화 벨소리가 객석에서 울리고 말았다. 전반 두 차례, 후반 한 차례였다. 잠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지메르만은 후반부 브람스 ‘3개의 간주곡’(작품 번호 117번) 가운데 첫 곡 연주를 마치고 기침한 뒤, 멋쩍은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하는 포즈로 객석에 웃음을 불어넣었다. 까칠한 남자의 따스한 속마음을 엿본 것 같았다고 할까. 이날 마지막 앙코르를 마친 뒤에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나와서 인사하면서 공연이 끝났다는 걸 알리기도 했다.
내한 독주회의 연주곡은 바흐의 파르티타 1~2번과 브람스의 간주곡, 쇼팽 소나타 3번이었다. 악보를 들고서 무대로 나온 지메르만은 한 곡씩 연주가 끝날 때마다 직접 악보를 넘기면서 연주했다. 그는 고국 폴란드의 작곡가 쇼팽과 시마노프스키부터 베토벤과 드뷔시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하지만 바흐 녹음이나 연주는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다.
첫 곡인 바흐 파르티타 1~2번부터 은은하면서도 소박한 정취가 감돌았다. 빠른 템포에서는 속주(速奏)를 피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느린 ‘사라방드’에서는 충분한 여유를 두면서 정적마저 감흥의 재료로 활용했다. 오른손 독주 부분에서 왼손을 허공에 저으며 뉘앙스와 표현을 다잡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무공해·무결점을 추구하던 초기 해석에서 자연스러운 호흡을 중시하는 스타일로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확인할 기회”라는 피아니스트 김주영씨의 말이 그제서야 실감났다.
지메르만은 열여덟 살에 참가한 1975년 쇼팽 콩쿠르에서 당시 최연소 우승을 거두며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이날 후반부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에서는 청년 시절의 격정과 화려함보다는 따스하고 인간적 면모가 두드러졌다. ‘신박 듀오’의 피아니스트 박상욱씨는 “쇼팽 소나타의 4악장 도입부 같은 경우에도 젊은 피아니스트들은 악보에 적히지 않은 ‘점점 빠르게’를 넣어서 급하게 연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지메르만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이 정확한 타이밍으로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지메르만의 이번 내한 리사이틀에는 전국 방방곡곡 2800리(里)를 따라다니는 기구한 피아노가 있다. 롯데콘서트홀에 소장하고 있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다. 지난 25일 대구콘서트하우스를 시작으로 27일 부산문화회관, 3월 1·2·6일 롯데콘서트홀, 3월 4일 대전예술의전당 등 모두 6차례의 공연 일정이다. 지메르만의 일정을 따라서 서울에서 대구 부산으로 갔다가 서울로 잠시 돌아온 뒤, 다시 대전까지 갔다가 악기의 ‘집’인 롯데콘서트홀로 돌아온다. 대략 1100km, 2800리의 강행군이다.
지메르만은 예전에는 아예 피아노 전체를 공수(空輸)했지만,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 뉴욕 공항의 검색 강화 조치로 파손 사고를 겪었다. 그 뒤에는 건반과 액션(건반을 누르면 해머가 현을 때리도록 하는 장치)만 들고 다니면서 공연장의 피아노에 조립해서 연주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은 “2018년 내한 공연 당시 만족한 지메르만이 2019년 서울과 대구, 인천에서 열린 한국 투어 때도 국내에서는 롯데콘서트홀에서 소장하고 있는 피아노를 운반해서 연주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