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시네마 클래식’은 영화와 음악계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는 ‘이야기 사랑방’입니다. 전·현직 담당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취재 뒷이야기와 걸작 리스트 등을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이태훈 기자가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듄(Dune)’의 데이비드 린치 감독 1984년작과 지난달 개봉한 드니 빌뇌브 감독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원작의 거대한 세계관에 익숙치 않으나 1000쪽 가까운 책을 읽을 여유는 없는 관객들에게, 1984년작은 2021년작을 더 효율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돕는 훌륭한 ‘애피타이저’가 될 지도 모릅니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1984년작과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올해 개봉작 '듄' 포스터.

지난달 20일 개봉한 영화 ‘듄’은 꽤 오래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관람객 평점도 무척 좋은 편입니다. 하지만 낮은 점수를 준 관객평을 살펴보니, 역시 예상대로였습니다. ‘올해 영화 30편 봤는데 지루해서 잔 건 처음’, ‘빌드업만 3시간’, ‘보다 잤네요, 대체 무슨 내용인가요’….

‘듄’은 북미 개봉 2주차인 지난 주말까지 전세계 박스오피스가 총 2억9834만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제작비는 1억6500만 달러로 알려져 있고, 워너브러더스가 2023년 10월에 속편을 개봉하겠다고 벌써 발표한 걸 보니 수익은 괜찮은 모양입니다. 메타 리뷰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는 평론가 신선도 지수가 83%, 관객 팝콘 지수가 90%입니다. 모든 지표가 흥행작이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좋은 영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관객은 지루하게 느끼는 걸까요. 아마도,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소설 ‘듄’의 방대한 세계관에 익숙치 않은 것도 큰 이유 아닐까요.

그래서 구글 플레이나 티빙 등에서 ‘사구(沙丘)’라는 제목으로 볼 수 있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1984년작 ‘듄(Dune)’을 떠올렸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앞으로 이야기할 몇 가지 특징들 덕에, 원작의 방대한 세계관과 새 영화 사이의 간극을 메워줄 ‘1타 강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 출간된 황금가지판 960여쪽 양장본 ‘듄’을 읽고 새 영화를 보면 가장 좋겠지만, 모두에게 그런 인내심과 여유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①원작의 설정과 인물에 관한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

1984년작 ‘듄’은 같은 원작이지만 완전히 다른 영화입니다. 4000만 달러로 제작해 3000만 달러 밖에 못 건진 ‘망작’이었지만, 흥행 참패 이후에도 원작과 SF 팬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컬트적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입문용으로써 장점이 돼 버린 이 작품의 특징은 ‘매우 설명적’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서와, 이 세계는 처음이지? 내가 찬찬히 설명해줄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래는 이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우주 황제 샤담 4세의 딸 이룰란 공주의 말의 대략적 개요입니다. 관객이 혹시라도 못 쫓아올까봐 천천히 또박또박 설명합니다.

“지금은 1만191년, 알려진 모든 우주는 샤담 4세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제가 그 딸입니다. 이 시기 우주에서 가장 귀중한 물질은 스파이스 ‘멜란지’입니다. 생명을 연장시키고, 의식을 확장하며, 우주여행을 가능케 하죠. 우주 길드의 항법사들은 4000년 동안 스파이스를 변이시켜 우주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했죠. 그리고 스파이스는 오직 한 행성에만 존재합니다. 메마르고 외딴 행성, 그 별의 주민 ‘프레멘’들은 바위 사이에 숨어 살면서 오랫동안 그들을 진정한 자유로 이끌어줄 한 사람, 메시아가 올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 행성의 이름은 아라키스, ‘듄(Dune·沙丘)’이라고도 불리죠.”

1984년작 '듄'에서는 우주의 지배자인 샤담 4세의 딸 이룰란 공주가 도입부에 등장해 영화의 설정을 지나치게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자, 이 설명으로 영화의 배경과 이야기의 무대에 관한 사전 지식이 확실해졌습니다. 인디와이어 보도에 따르면, 1984년작에 신비주의 정파 ‘베네 게세리트’의 일원이자 주인공 폴 아트레이데스의 어머니 ‘레이디 제시카’로 출연했던 프란체스카 애니스는 “프리미어 시사에서 영화가 시작되고, 도입부터 이룰란 공주가 이야기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순간 ‘아, 이 영화 망했어’ 하고 생각했다”고 회고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관객에게 설명해야 하는 영화라니, 평가가 좋을 리 없죠.

1984년작은 이후에도 어려운 용어가 나오면 설명을 반복합니다. 예를 들어 베네 게세리트의 대모는 레이디 제시카를 만나 꾸짖으며 말합니다. “네가 정말로 퀴사츠 헤더락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이냐. 범우주적이며 초월적인 존재를?” 자, 우리는 이제 아라키스의 프레멘이 기다리던 존재, 베네 게세리트가 명문가들 사이의 정략 결혼을 통해 만들어내려하는 시공을 초월한 범우주적 초인을 ‘퀴사츠 헤더락’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②2021년판에 롱테이크와 여백으로 표현된 장면의 의미

BBC가 21세기 최고의 영화로 선정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만든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지만, 그에게 ‘듄’은 지우고 싶은 기억입니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지우고 싶은 기억, 가장 슬픈 일”이라고 회고한 적도 있습니다. 아예 영화에서 자기 크레딧을 빼버리기도 했고요. 유니버설 스튜디오, 프로듀서 디노 드 로렌티스(앤서니 퀸 주연의 ’라스트라다’를 제작한 PD입니다)와 그 딸 라파엘라는 린치에게 최종 편집권을 주지 않고, 3시간짜리 원본을 2시간 15분짜리로 가위질했습니다. 린치는 어둡고 종말론적 분위기를 원했지만, 프로듀서들은 비디오로 변환할 때 편리하도록 밝은 화면을 원하는 등 사사건건 간섭했습니다. 린치가 “내 작품이 아니다”고 반복해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왼쪽부터 1984년작의 주인공 ‘폴’을 연기한 카일 맥라클란, 2003년 TV 시리즈 ‘듄의 아이들’에서 폴의 아들 ‘아트레이데스 2세’를 연기한 제임스 맥어보이, 2021년작의 주인공 ‘폴’인 티모시 살라메. 당대 최강 꽃미남 배우들의 ‘리즈 시절’을 보는 것은 늘 즐거운 일입니다.

2021년작을 만든 빌뇌브 감독이 고향인 캐나다 퀘벡의 작은 도서관에서 ‘듄’을 처음 만난 건 열네 살 때였습니다. 표지엔 짙은 피부색에 꿰뚫을 듯 푸른 눈의 남자가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죠. 정말 아름다운 책이었습니다. 빌뇌브는 지금도 같은 표지의 판본을 지니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미스터리, 소외, 외로움 같은, 그 때 ‘듄’에서 느꼈던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 지금도 가끔 펼쳐보곤 한다”고 했습니다. “가장 꿈에 가까운 영화를 찍고 싶었어요. 10대 때 부터의 꿈이었던 거죠.”

드니 빌뇌브는 중동 분쟁의 슬픔을 고대 희랍 비극처럼 빚어낸 충격적 작품 ‘그을린 사랑’(2010) 같은 아트하우스 영화를 주로 만들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 마약 전쟁을 그린 서늘한 액션물 ‘시카리오’(2015), 철학적 깊이가 남다른 SF ‘컨택트’(Arrival·2016), 전설적 명작의 속편으로 주목받은 ‘블레이드 러너 2049′(2017)같은 블록버스터로 넘어왔습니다. 2021년작 ‘듄’은 블록버스터의 시각적 스펙터클과 빌뇌브 특유의 작가주의적 특징이 기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말로 설명할수 없는 인물의 심리 상태나 분위기 같은 것들을 미장셴과 롱테이크로 보여주려 하죠. 아마 어떤 관객에겐 이런 부분이 ‘지루하다’는 느낌의 원인이 되기도 했을 겁니다. 어느 정도 주의 집중해서 들여다봐야 그 의미를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1984년작 '듄'의 영화 스틸 이미지 컷. 왼쪽 위 장면에 아라키스의 프레멘족 운명의 여인 '차니'로 등장한 여배우는 리들리 스콧의 전설적 걸작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여주인공 '라헬'을 맡았던 션 영이다. 오른쪽 위 장면엔 아트레이디스 가문의 원수 하코넨 가문의 맹장으로 출연한 가수 스팅.

하지만 1984년판은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다 설명해버립니다. 원작 소설은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인물의 독백을 많이 사용하는 편인데, 1984년판 영화는 그 독백을 그대로 화면 위에 풀어버립니다. 예를 들어 베네 게세리트의 대모에게 주인공 폴이 목숨을 건 시험을 받을 때, 2021년판의 폴(티모시 살라메)은 눈빛과 표정으로 모든 걸 표현합니다. 하지만 1984년판의 폴(카일 맥라클란)은 머릿속 생각을 관객들에게 술술 독백으로 풀어냅니다. 심지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1984년판을 보고 2021년판을 보면, ‘저 장면이 무슨 뜻이지?’ 하며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매우 적어집니다.

③2021년판 ‘듄’과 속편에 대한 기대감 상승

사실 우리나라 관객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로 불리는 ‘에픽(Epic) SF’ 장르에 상당히 박한 편입니다. 미국에선 현대의 전설이 된 스타워즈 시리즈도 한국 흥행은 맥을 못 췄습니다. 코로나 시국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 ‘듄’이 이만큼이라도 흥행한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2021년작 ‘듄’은 원작 소설 1권의 절반 정도 만을 다룹니다. 그래서 ‘파트 1′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죠. 하지만 1984년작 ‘듄’은 원작 소설 1권 전체를 다룹니다. 그러니까 1984년작을 보면 파트2가 어떻게 진행될지도 미리 예측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1984년작의 특수 효과는 나름 ‘엣지’가 있으나 드문드문 보기 민망한 수준이지만 그에 비해 2021년작의 스펙터클과 특수효과는 진심 압도적입니다. 액션 씬에도 디테일하게 감정을 입히고, 정적인 시퀀스도 세밀하게 심리적으로 압박해옵니다. 원작의 아우라에 억눌리지 않고 자기 스타일로 밀어 붙이는 이 정도의 뚝심은 빌뇌브 수준으로 에고가 강한 감독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원작 자체가 중세 기사도 판타지의 영향이 큰 줄거리인데도, 캐릭터와 미술 디테일이 너무 압도적이라 과학적 설정을 중시하는 ‘하드 SF’가 아닌가 깜빡깜빡 착각할 지경입니다.

올 10월 개봉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 스틸 이미지들. 극강의 비주얼과 액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1984년이면 거의 40년 전 아닙니까. 아무리 최신 기술을 동원했다 해도, 1984년작을 보고 2021년작을 보면 새로 나온 ‘듄’이 얼마나 잘 만든 영화인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1984년작을 통해 속편의 줄거리도 대략 알게 됐으니, 속편에서는 어떤 비주얼과 스타일의 충격을 가져다 줄 것인지 더 큰 기대를 갖게 됩니다. 당장 위의 1984년작과 2021년작의 예고편만 비교해봐도, 더 늦기 전에 극장으로 달려가 이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