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은 2일 추가경정예산안(추경)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국회 시정연설에서 중동 전쟁으로 인한 경제 상황에 대해 “현재 조성된 위기는 잠깐 내리고 그치는 소나기가 아니라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거대한 폭풍우”라며 “이번 추경은 위기의 파도로부터 국민의 삶을 지켜줄 방파제”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코스피 지수 5000 돌파에 이어 세계 시장을 이끄는 반도체, 조선 등 우리 기업 활약으로 우리 경제가 다시금 비상할 기회를 맞았지만, 중동 전쟁으로 인해 예상 밖의 복합 위기에 처했다”며 “비상 상황에는 그야말로 비상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위기’를 28번이나 언급했다.
정부는 이번에 총 26조2000억원 규모의 추경을 편성했다. 소득 하위 70% 국민 3577만명에게 1인당 10만~60만원씩 주는 ‘고유가 피해 지원금’이 핵심이다.
이 대통령은 “국채를 발행하지 않는 ‘빚 없는 추경’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며 “증시·반도체 경기 호황 등에 따른 초과 세수 25조2000억원과 기금 자체 재원 1조원을 활용하겠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위기 극복의 성패는 속도에 달려 있다”며 국회의 추경안 처리에 “초당적인 협력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이에 대해 국민의힘은 “지방선거용 현금 살포 추경”이라며 일부를 삭감·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장동혁 대표는 “선거 후 세금 핵폭탄을 떨어뜨리기 위한 달콤한 마취제”라며 “무능은 현금 살포로 덮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한편 이 대통령은 시정연설에 앞서 우원식 국회의장,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장동혁 대표 등과 가진 사전 환담 자리에서 여야 합의가 가능한 부분에 한해 오는 6·3 지방선거에서 개헌을 하자고 말했다. 대통령 임기 등 권력 구조 개편을 포함한 전면적 개헌은 지방선거 전에 합의점을 찾기 어렵겠지만,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이나 비상계엄 요건 강화 등은 “누구도 이론이 없을 만한 부분이어서 충분히 합의될 수 있다”고 했다.
개헌을 위해선 국민의힘의 동의가 필요한데, 국민의힘은 지방선거 후에 권력 구조 개편까지 포함해 개헌을 추진하자는 입장이다.
◇李, 위기 28차례 언급하며 “에너지 절약 동참해달라”
이재명 대통령의 2일 국회 시정 연설 키워드는 ‘위기’였다. 이 대통령은 “중동 전쟁이 야기한 중차대한 위기 앞에 우리 국민의 삶과 경제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중동 전쟁이 시작된 지 오늘로 34일째”라며 “무엇보다 이 상황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철저하고도 단단한 대응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중동 사태를 “최악의 에너지 안보 위협”이라며 “민생경제 전시 상황이라는 엄중한 인식을 갖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도 했다.
이 대통령은 “당장 내일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파괴된 중동의 에너지 인프라 시설이 복구되고 이전과 같은 원활한 수급이 이뤄지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며 “위기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만큼 긴 안목과 호흡으로 지금의 위기를 넘고, 내일을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청와대는 당초 이 대통령의 시정 연설을 오전 10시로 계획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동 전쟁 관련 대국민 연설이 한국 시각 오전 10시로 잡히자 연설을 오후 2시로 미뤘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에서 종전 등 중동 상황 변화를 언급할 경우 이 대통령의 시정 연설에도 반영할 계획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 연설에는 종전 관련 언급이 담기지 않았다”며 “이 대통령의 시정 연설문도 고쳐 쓸 내용은 별로 없었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위기일수록 사회적 약자를 더 두텁게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과, 경제 회생의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 아래 총 26조2000억원 규모 추경을 마련했다”며 “국민이 낸 세금을 국민들께서 필요로 하는 곳에, 적기에 사용하는 것은 정부의 마땅한 책무”라고 했다.
이번 추경은 소득 하위 70% 국민 지원 등 ‘고유가 부담 완화 3대 패키지’에 10조1000억원, 청년 창업·일자리 지원 등 민생 안정에 2조8000억원, 산업 피해 최소화·공급망 안정에 2조6000억원, 지방재정 확충에 9조7000억원, 국채 상환에 1조원 등으로 구성됐다. 국민 지원금은 지역화폐로 지급된다. 이 대통령은 “지역과 골목 상권의 소상공인·자영업자에게 도움이 되고 경기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국회에 이번 추경의 신속한 처리를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과거의 위기 사례를 돌이켜 보면 예상하지 못한 외부 충격에 선제 대응이 늦을수록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국민 여러분께서도 대중교통 이용, 생활 절전과 같은 일상생활 속 에너지 절약 실천에 적극 동참해 주시길 간곡하게 호소드린다”며 “공동체 위기를 틈타 담합, 매점·매석 등 부당 이익을 취하는 행위는 무관용 원칙에 따라 엄정 대응하겠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이번 추경이 6·3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선거용 현금 살포’라고 비판했다. 장동혁 대표는 당 회의에서 “말로는 전쟁 추경이지만 실제로는 선거 추경”이라며 “국민 70%에 최대 60만원씩 현금을 살포하고 영화표까지 나눠주면서 지방선거 표를 사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은 소득 하위 국민에게 지급하는 피해 지원금 대신 중동 사태로 피해를 본 업종을 특정해 지원하는 ‘핀셋 추경’을 주장해 왔다. 고유가로 피해를 본 화물차, 택시, 택배 기사, 푸드트럭 등에 1인당 60만원의 유류 보조금을 주는 방안 등이다. 국회 예산결산특위 국민의힘 간사인 박형수 의원은 “높은 기름값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집단을 집중 지원해야지, 전체를 대상으로 한 돈 풀기는 선거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날 이 대통령은 본회의장에 입장하면서 민주당 의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연설 후 퇴장할 때는 국민의힘 의원석으로 가서 국민의힘 의원들과도 웃으며 악수했다. 국민의힘은 작년 11월에는 이 대통령의 예산안 시정연설을 보이콧했지만, 이날은 차분하게 연설을 경청했다. 연설 시작 전 이 대통령은 “오랜만에 여기서 (의원들을) 봤더니 좀 낯설다”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