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로 “민생 문제 해결에 앞장서겠다”며 표를 호소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후 정치권에서 민생은 뒷전이 됐고 여야 모두 내부 권력 싸움에 몰두하고 있다. 국민의힘에선 당대표와 이른바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 사이에 낯 뜨거운 공개 설전이 벌어지고 있고, 더불어민주당에선 선거 패배 책임론을 두고 친명(친이재명)과 친문(친문재인) 간 충돌이 격화되는 모양새다. 윤석열 대통령이 ‘경제 태풍’을 경고할 만큼 대내외 경제 악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몰려오는 상황에서 이를 대비해야 할 국회는 법사위원장 자리를 놓고 신경전만 벌이다 개점휴업 상태다.

원구성 협상 난항으로 국회 공백 상태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9일 국회를 참관한 학생들이 텅 빈 본회의장에서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국회는 지난 7일부터 일반인 본회의장 참관을 재개했다. /국회사진기자단

여야가 모두 선거가 끝나자마자 내전에 돌입한 것은 차기 지도부가 2024년 총선 공천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혁신 경쟁’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권력 투쟁이 본질이라는 얘기다. 2년 동안 전국 선거가 없기 때문에 국민들의 비난에도 당내 주도권을 가져가기 위한 싸움에 들어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4선 중진인 우상호 의원이 이끄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켜 지방선거 참패에 따른 내홍 수습에 나섰지만 친명-친문 간에 상대편을 겨냥한 문자 폭탄과 대자보 테러가 난무하고 있다. 갈등의 중심에 서있는 이재명 의원이 9일 지지자들에게 ‘문자 폭탄 자제’를 호소했지만 이미 양측 감정의 골은 되돌리기 힘든 수준이라는 말이 나온다.

민주당 갈등의 내면에는 차기 당권 경쟁이 있다. 친명 측은 8월 전당대회에서 이재명 의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룰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친문계는 “선거 패배의 가장 큰 책임자가 나서는 게 말이 되느냐”며 이 의원 출마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

국민의힘에서는 이준석 대표와 정진석 국회부의장 간의 입씨름이 나흘째 이어졌다. 이 대표는 9일 “당대표 저격해서 자기 입지 세우려는 사람이 당을 대표하는 어른인가”라며 다시 한번 정 부의장을 저격했다. 끝장을 보겠다는 것이다. 정 부의장이 지난 6일 이 대표의 우크라이나 방문을 비난하면서 시작된 설전은 ‘개소리’ ‘육모방방이’ ‘싸가지’ 등 거친 표현이 오가며 격화됐다.

당 내홍 조짐에 권성동 원내대표가 이날 “감정 싸움으로 비화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중재에 나섰지만, 결국 신-구세력 간, 주류-비주류 간의 당권을 둘러싼 갈등이기 때문에 확전 가능성이 높다.

여야가 그들만의 싸움을 벌이는 동안 국회 공백 상태는 열흘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30일 0시를 기해 21대 전반기 국회가 종료됐지만 후반기 원 구성은 이뤄지지 않았다. 양당이 ‘법제사법위원장 양보 불가’ 입장을 고수하면서 협상은 진척이 없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민주당의)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 독식은 입법 폭주의 구조적 원인이었고, 원인을 제거해야 협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반면 민주당은 우선 국회의장을 선출한 뒤 법사위원장 등 상임위 배분을 재협상하자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원 구성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박순애 교육부 장관 후보자, 김승희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등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줄줄이 밀리고 있다. 윤 대통령이 지난 8일 김창기 국세청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재송부를 국회에 요청했기 때문에 11일 이후에는 사상 최초로 ‘인사청문회 패싱’ 국세청장이 임명될 수도 있다.

문제는 민생을 이처럼 뒷전으로 미뤄도 될 만큼 우리 경제가 한가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코로나 팬데믹에 이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이미 사회 곳곳에서 위기를 알리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물가는 14년 만에 5%대 상승률을 기록했고, 좀처럼 꺾일 줄 모르는 원자재 가격은 수출 중심의 우리 경제 구조를 위협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2.7%로 낮췄고. 세계은행도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4.1%에서 2.9%로 대폭 낮췄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거대 양당이 국민 안위보다는 기득권 유지와 당권 경쟁에 혈안이 돼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