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북한 지령을 받고 활동해온 ‘자주통일 충북동지회’를 수사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최근 북한 김여정의 한미 연합훈련 연기 요구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며 사실상 연기를 주장했다. 그런 국정원이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여권에 타격을 줄 수 있고 북한이 반기지 않을 간첩단 사건을 수사하고 나왔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최근 “간첩이 있으면 잡는 게 국정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 정부 계획에 따라 2024년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넘겨주게 될 국정원 대공수사팀이 장기간 준비한 이번 사건을 묵살했을 경우의 ‘후폭풍’을 고려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3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박 원장은 이날 비공개로 열린 회의에서 북한 김여정의 한미 연합훈련 연기 요구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회사진기자단

충북 청주 지역 시민단체 활동가 A씨 등 4명은 북한 지시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를 결성한 뒤 공작금을 받고 미국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 F-35A 도입 반대를 촉구하는 서명운동 등을 벌인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를 받는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중국과 캄보디아 등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과 경찰은 지난 5월 청주에 있는 이들의 자택과 사무실 등을 압수 수색했고, 이 사건은 지난 7월 말 언론 보도를 통해 공개됐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이 같은 수사는 해외 조직이 있는 국정원 아니면 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은 당혹해했다. 이들 중 일부가 2017년 대선 당시 문 대통령 캠프 특보로 활동했고 여당 중진과 함께 통일 사업도 추진했다는 등의 의혹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청와대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며 강경 대응했고, 민주당은 “수사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며 침묵했다. 이와 맞물려 박지원 국정원장 사퇴설까지 나돌자 “여권이 국정원에 대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민주당 한 의원은 “간첩 사건은 임기 말에 남북 통신선이 복원되고 북한과 대화를 추진하는 등 실마리가 잡히는 상황에서 악재”라며 “대선 주자들도 휘발성이 있는 문제라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2일 오후 북한의 지령을 받아 미국산 스텔스 전투기 도입 반대 활동을 했다는 의혹을 받는 충북 청주 지역 활동가 4명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위해 법정에 출석하고 있다./연합뉴스

정치권에서는 국정원이 간첩 사건 수사를 주도한 이유를 국정원의 내부 사정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범여권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있고, 문재인 정부가 권력기관 개혁을 통해 2024년부터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국정원이 간첩단 사건을 내세워 대공 수사의 중요성을 과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실제 국정원은 이 사건에 대한 첩보를 이전 정부에서 입수했고 관련 정보를 취합해오다가 최근 수사에 속도를 낸 것으로 전해졌다. 국회 정보위 관계자는 “경찰로 대공수사권이 이관되면 이런 수사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최근 국정원은 정의당이 주도해 발의한 국가보안법 폐지안과 관련해 국회에 “신중 검토가 필요하다”며 사실상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여권 관계자는 “박지원 국정원장이나 국회 정보위 소속 여당 의원들도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여러 증거를 보고받고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며 “현 정권에 불리하더라도 이를 감추려고 했다면 오히려 뒷감당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았겠냐”고 했다.

일각에선 특정 대선 후보를 겨냥한 정치적 수사라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 A씨 등 간첩단이 평소 유력 인사와의 관계를 내세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 때문에 ‘대선 후보 견제’란 해석도 있다. 여권 관계자는 “최근 수사기관들이 어느 후보에 줄을 섰다, 더 이상 정권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들이 정치권에서 심심치 않게 들린다”며 “내년 대선을 앞두고 굉장히 복잡한 함수 관계 속에서 이번 수사가 공개된 것으로 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