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정치’ ‘나는 꼼수다 뒷담화’ ‘진보집권플랜’ ‘박원순과 시민혁명’…. 10년 전인 2011년 한국의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들이다. 당시 교보문고가 조사했더니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상위 20위 가운데 16종이 반(反)우파 성향 도서였다. 이 책들의 저자인 김어준·김용민·조국 등은 지금도 출판 시장을 쥐락펴락하면서 진보·좌파 집권의 당위성을 전파하는 선전가로 활동하고 있다. 유시민씨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진보 정권의 어용 지식인이 되겠다”고까지 했다.

정권 비판서 말말말

진보가 장악했던 독서 시장이 최근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무능과 편 가르기, 검찰 장악과 언론 길들이기, 공정을 전파하던 586 집권 세력의 위선·탐욕에 실망한 지식인들이 정권 비판서를 잇달아 내면서 시작된 변화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서민 단국대 교수, 김경율 회계사, 권경애 변호사 등 과거 진보 진영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앞장선 것도 특징이다. 독자층도 호응하고 나섰다. 조국 전 법무장관 가족의 특권적 행태와 이른바 ‘문빠’를 앞세운 팬덤 정치를 질타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는 ‘조국 흑서’로 불리며 지난해 출간 이후 10만부 넘게 팔리는 대박을 냈다. 진중권 전 교수의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도 2만부를 넘겼다.

문재인 정권을 향한 비판은 진영을 넘어 전개되는 양상이다. 진보 지식인들은 이 정권의 진보 가치 훼손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는다. 진보 진영의 대표 저술가로 활동해 온 강준만 교수는 2019년부터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등을 잇달아 내며 현 정권에 날을 세웠다. ‘싸가지 없는 정치’에서 강 교수는 김어준씨를 ‘음모론을 양성하는 자’로 규정했고 KBS 등 공영방송의 정부 편향적 방송 행태에 대해선 “정권이 바뀌어도 지금처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지난 4월 펴낸 ‘부족국가 대한민국’에선 문재인 정권의 속성을 ‘정치적 부족주의’라고 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에 따르면 정치적 부족주의는 이념이나 원칙보다 정치 패거리의 집단 이익을 중시하는 태도를 뜻한다. 강 교수는 부족주의의 전사(戰士)인 이 정권 지지자들의 판단 기준은 오직 자기 부족에 유리한가, 불리한가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이 정권의 내로남불은 ‘정치적 부족주의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단언한다. ‘강남 좌파’(2011)에서 “강남 좌파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좌파를 싸잡아 비판하겠다는 우파의 정치적 책략”이라고 옹호했지만, 2019년 펴낸 ‘강남 좌파2’에선 “진보적인 척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다”라는 말로 현 정권 중추 세력이 된 강남 좌파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였다.

유시민·조국 등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 5주기 기념 저서 ‘그가 그립다’를 공저했고 2017년 탄핵 정국 때는 ‘B급 정치’ ‘서민적 글쓰기’를 통해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공격했던 서민 단국대 교수도 ‘윤지오 사기극과 그 공범들’(2019)을 내면서 현 정권과 절연했다. 이듬해엔 ‘조국 흑서’ 필진으로도 참여했다. 서 교수는 “정의를 부르짖던 자들이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를 보면서 내가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며 “특히 장자연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사기꾼에 불과한 윤지오를 끌어들인 이들에게 실망했다”고 말했다. 진보 운동가로 활동했던 유창선 정치 평론가는 4월 서울·부산 보궐선거 직전 펴낸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인 소통과 공론의 장이 이 정권 들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현 정권 사람들은 나와 다른 상대를 악마화한다”며 ‘토착 왜구’란 표현은 그런 악마화에 동원된 ‘언어의 흉기’라고도 했다.

진보 지식인들의 잇단 정권 비판서 출간을 전향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조국 흑서’를 출판한 선완규 천년의상상 대표는 “문재인 정권에 실망한 지식인들이 책을 통해 진보 가치 회복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 정권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책을 통해 해소하고 싶어 하는 독서 대중의 의지가 반영된 현상이란 해석도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투표로 당선된 인물이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현실에 대한 당혹스러움과, 극단의 정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등이 정치·사회 분야 도서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우파 지식인들은 주로 현 정권의 정책 실패를 집중적으로 따진다. ‘최저임금 1만원’을 앞세운 소득 주도 성장이 오히려 하층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빈부 격차를 키운 정책 역설을 지적한 ‘평등의 역습’, 부동산 정책 실패를 조목조목 꼬집고 공급 확대 필요성을 주장한 ‘집이 언제나 이긴다’, 이 정권에서 노골화되는 표현의 자유 침해를 비판한 ‘법복은 유니폼이 아니다’ 등이 우파적 가치 회복과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 나연준 제3의길 편집인과 주한규 서울대 교수 등은 공저 ‘박원순은 살아있다’에서 박 시장 9년간의 시정을 도시 재생, 고용·노동, 인사, 홍보, 의료 행정 등으로 세분해 평가했다. 저자들은 “지난 9년 서울시는 좌파의 병참기지였으며 서울 시정은 좌파적 몽상의 실험장”이라고 요약했다. 기파랑과 비봉 정도만 눈에 띄던 우파 성향 출판사 수도 백년동안, 열아홉책 등이 가세하며 증가 추세다.

정권을 담당한 586 진보 세력에 대한 실망은 세대 담론으로 확장되고 있다. 1990년대생 청년층을 중심으로, 586의 특권 의식과 불공정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책들을 내고 있다. 박원익·조윤호씨가 함께 펴낸 ‘공정하지 않다-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586세대를 “일단 ‘너는 누구 편이냐?’ 하고 묻는 데 익숙한 세대”라고 꼬집는다. 20대는 정치적 입장을 먼저 정해 내 편 네 편으로 갈려 싸우기보다 개별 사안을 더 정확하고 공정하게 파악하려는 자세를 더 좋은 태도로 여기지만, 586에겐 이런 합리적 태도가 결여돼 있다고 지적한다.

1994년생으로 서울대 학부 재학생인 임명묵씨는 지난달 출간한 ‘K-를 생각한다’에서 586을 “주류가 됐으면서도 여전히 주류는 따로 있다고 여긴다. 혁명을 말하면서 상류 중산층으로서 혜택은 누리고자 한다. 교육과 인맥으로 계층 세습을 추구한다”고 평가했다. 책에 수록된 ‘대한민국 386 일대기’ 편에선 “조국 사태는 586이 자산 증식과 계층 세습에 골몰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스테레오 타입을 드라마보다 더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썼다. 이런 청년들 눈에 회고록 ‘조국의 시간’에서 온갖 특권적 행태를 누린 자신과 가족을 검찰 개혁의 희생양으로 포장한 조국씨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민주주의 위기 경고하는 번역서들, 잇따라 출간]

국내 저자들이 한국 민주주의 위기 징후를 현장 중심으로 정리했다면, 정치·사회 분야 번역서들은 좀 더 심층적인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 하버드대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는 ‘선출된 독재자 감별법’을 제시한다. 경쟁자를 헌법 질서 파괴자라고 비난하면서 적대시하거나, 법을 앞세워 야당·시민단체·언론을 협박하는 지도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2018년 번역된 이후 지금까지 이 분야 베스트 10에 머물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프랑스 자유주의 정치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는 한 야당 의원이 지난해 국회 필리버스터 때 읽은 것을 계기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토크빌은 이 책에서 “고문은 옛 폭정이 사용하던 거친 도구일 뿐, 민주공화정에서 폭정은 신체는 내버려두고 곧장 영혼을 공격한다”고 썼다.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인권과 민주적 가치를 억압할 수 있다는 경고다.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법 추진, 역사왜곡방지법 발의와 대북전단금지법 도입 등 다수 의석을 앞세워 폭주하는 정부 여당의 행태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 정치학자 디들러 매클로스키의 ‘트루 리버럴리즘’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배제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준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사회주의·파시즘 국가처럼 큰 정부를 선호하고 법 만능주의에 빠진다. 선의를 앞세운 각종 규제로 국민을 옭아맴으로써 창의성을 말살하고 국가 발전에 해악을 준다고 경고한다.